박세일 의원 “야당이 원칙 잃으면 국민이 버린다”

  • 입력 2005년 3월 16일 06시 55분


15일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국회의장실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 박 의원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이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5일 김원기 국회의장에게 의원직 사직서를 제출하기 위해 국회의장실을 방문한 한나라당 박세일 의원. 박 의원은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표의 리더십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이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미안하다….”

행정도시법 국회 통과에 반발해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던 한나라당 박세일(朴世逸) 의원이 15일 의원직을 던졌다. 이날 국회에서 사직 기자회견을 마친 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본보와 단독 인터뷰를 가진 박 의원은 이렇게 말한 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봤다.

헌정 사상 법안 처리 문제로 의원직을 던진 것은 박 의원이 처음이라는 게 국회 사무처 측의 추정이다. 그는 사직 소감을 묻자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탄핵 역풍으로 야당이 붕괴되면 대의민주주의에 위기가 온다고 생각해 입당한 게 지난해 3월 25일이니까 근 1년 만에 정치 인생을 마감했다. 자유주의 개혁을 해보려고 곳곳에 씨를 많이 뿌렸는데 거둔 게 별로 없어 안타깝고 미안하다.”

이날 사직 기자회견에서 “열린우리당은 ‘거수기 정당’, 한나라당은 ‘들러리 정당’”이라고 싸잡아 비난한 박 의원은 박근혜(朴槿惠)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지도부에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여야 협상 과정에서 내가 하도 반대를 하니까 나중에는 실무팀이 협상 과정을 나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대표도 이런 사실을 알았나.

“박 대표가 미안했던지 나중에는 직접 나에게 협상 결과를 알려줬다.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박 대표에게 두 가지만 부탁했다.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는 절대 옮겨서는 안 되고, 박 대표는 중립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물론 지켜지지 않았지만….”

―행정도시법 당론을 결정한 지난달 23일 의원총회에서 결사 반대하지 그랬나.

“표결에 들어가면 부결될 줄 알았다. 의총이 끝나고 허탈해서 내가 소장을 맡았던 여의도연구소 식구들과 밤늦도록 소주를 마셨다. 그날 집에 못 갔다.”

―이번 일에 대한 박 대표의 태도를 어떻게 보나.

“나이브(naive·순진)했다고 생각한다.”

―박 대표의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말인가.

“그가 양질(良質)인 것은 분명하지만 난세에 맞는 리더십을 갖추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박 의원은 “이번 일을 겪으며 한나라당이 수권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확신했다”며 “우선 당의 야성(野性) 회복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당내 지적(知的) 인프라는 충분하다. 문제는 정치적 투쟁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소속 의원들을 ‘전투적 자유주의자’로 양성하는 게 급선무다.”

박 의원은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야당이 원칙을 잃으면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한다는, 엄중한 역사의 심판을 명심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한나라당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당 해체에 버금가는 고민과 시련을 겪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당 일각에서 뉴 라이트 운동과의 접목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아직 시기상조”라고 단언했다. “뉴 라이트는 이제 시대의 정신이 됐다. 한나라당은 아직 뉴 라이트 정신을 수용할 준비가 안됐다.”

그는 조만간 경기도의 한 사찰에 들어가 진로를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 청년들을 대상으로 사회 철학 역사에 대한 강의를 하는 것도 선택 방안의 하나. 대학(서울대 국제대학원) 복직 여부도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박 의원은 지난 주말 가깝게 지내 온 이각범(李珏範) 재단법인 IT전략연구원장과 서울대 유우익(柳佑益) 지리학과 교수 등을 만나 조언을 구했다. 이들은 그에게 “사퇴를 해야 역사적으로 잘못된 정책에 용기있게 저항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큰 포부를 갖고 정치권에 뛰어들었다가 아쉬움을 안고 떠나는 박 의원의 ‘탈(脫)정치’ 행보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다.

이승헌 기자 ddr@donga.com

□ 박세일 의원은…

△서울 출생, 57세

△서울대 법대, 미 코넬대 경제학 석·박사

△서울대 법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대통령정책기획, 사회복지수석비서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한나라당 부설 여의도연구소장,

정책위의장(17대 의원)

▼비례대표 탈당땐 의원직 자동박탈▼

김원기(金元基) 국회의장은 박세일 의원이 15일 제출한 의원 사직서를 반려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박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하는 방법은 탈당밖에 없게 됐다. 국회법은 비례대표 의원이 탈당하면 의원직이 자동 박탈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박 의원은 이날 김 의장을 만나 “탈당하지 않도록 의장님께서 반드시 사직서를 수리해 달라”고 간곡히 요청했고, 기자회견에서도 “한나라당을 사랑하기 때문에 탈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의장의 한 측근은 “박 의원이 국회의 의사일정이 아니라 당론에 반대해 사퇴키로 한 만큼, 굳이 의원직을 사퇴하겠다면 탈당을 하는 것이 맞다”고 선을 그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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