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사람의 태도가치에 대하여

  • 입력 2005년 3월 16일 17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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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대립을 안은 채 6·25 내전이 발발하자 좌냐 우냐 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의 ‘사상’이 아니라 그 목숨을 좌우하는 문자 그대로 ‘치명적인’ 판정기준이 되었다.

누구는 좌익이라 해서 우익이 학살하고 누구는 우익이라 해서 좌익이 학살했다.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은 당시 내가 재학 중이던 구제(舊制) 중학교 교정에서까지 전개되었다. 생사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오직 좌냐 우냐 하는 잣대. 좌편에겐 우익은 그 자체로 절대악이요, 우편에는 좌익이 그 자체가 절대악이었다. 그 결과 전장에서 전사한 군인 못지않게 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동족 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념 싸움의 소름끼치는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들 당시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분명한 것은 좌우익 양쪽엔 다같이 이념과 상관없이 반대편에도 훌륭한 사람이 있고 우리 편에도 못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이념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좌우이념으론 인격 평가못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 좌우 이념 대립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걸 보며 6·25전쟁을 겪은 세대가 걱정하는 것은 이념이 다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배타적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여야, 보혁, 좌우의 어느 쪽이냐 하는 정치적 입지는 결코 사람을 평가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은 못 된다. 우리 주변에는 탁 트인 보수파가 있는가 하면 꽉 막힌 개혁파도 있다. 반대의 경우도 물론 있다. 사려 깊은 여 의원이 있는가 하면 분별없는 야 의원도 있다. 역시 반대의 경우도 있다. 사람의 인격이란 필경 정치 이념의 입지를 초월해 있는 것이다.

이념의 부활에 앞서 한국 사회에 위세를 떨쳐 왔고 아직도 떨치고 있는 또 다른 가치기준이 황금주의, 배금(拜金)주의 원리이다. 가격이 곧 가치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값비싼 그림이 곧 좋은 그림이요, 입장권이 비싼 음악이 곧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하는 심미적 기준, 나아가 ‘몸값’이 비싼 선수나 배우가 곧 훌륭한 스포츠맨이요 연예인이라 치부하는 인격적 기준에까지 미치고 있다.

세상에 우리나라 언론처럼 체육인 연예인의 몸값이 경제기사 아닌 문화 체육기사의 헤드라인이 되는 나라가 또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비싼 몸값을 받고서도 인격적으로는 어쭙잖은 사람도 있고 수입은 적으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체육인 연예인도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 이념의 입지를 초월하는 인격의 가치, 돈으로 몸값으로 따질 수 없는 인격의 가치란 무엇인가. 물론 학문 예술 또는 기업의 분야에서 사람이 이룩한 업적은 값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적 가치’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격적 가치의 전부는 아니다. 아무것도 창조하지는 아니했어도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어렵사리 지켰다는 것은 창조 못지않게 값진 것은 아닐까. 아니 그보다 아무것도 만들지도 지키지도 아니했으나 어려움 앞에서 꿋꿋하게, 의젓하게, 훌륭하게 살아낸 삶은 그 자체가 값있는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세상의 많은 이름 없는 어머니 아버지들처럼…. 오스트리아의 어느 정신의학자는 그러한 삶의 값어치를 ‘태도가치’라 불렀다.

▼신선한 뉴스 ‘의원직 사퇴’▼

사람의 숨겨진 태도가치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은, 예컨대 죽음에 직면했을 때이다. 비록 픽션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영화 ‘타이타닉’에서 죽음에 직면한 사람의 다양한 태도가치를 목격했다. 그러나 삶의 태도가치는 반드시 죽음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일상적으로는 돈 앞에, 권력 앞에 서게 될 때 위선의 두루마기를 뒤집어쓴 사람의 태도가치가 그 알몸을 드러낸다. 고위 관료의 배임 수뢰, 정치인의 변절 배신 등은 돈과 권력 앞에 여지없이 벌거숭이가 된 싸구려 인격의 흔한 작태이다.

이런 세태 속에서 박세일 의원의 의원직 사퇴는 이 땅의 지저분한 정계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신선한 뉴스같다.

최정호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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