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청산 요구와 관련해 17일 발표된 일본 외상의 담화는 크게 보아 일본의 종래 주장을 되풀이한 데 그친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 측의 역사 문제 제기에 대한 일본의 대응이 미온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한일관계에 드리운 대치 국면은 따라서 당분간 쉽사리 해결점을 찾기 어렵게 됐다.
▽국내용 담화=일본 정부 담화를 관통하고 있는 기조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으니 앞으로 어떤 정책 변화도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
18일 오전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관방장관은 각료회의 후 기자회견에서 “외상이 보고한 내용은 어제 저녁 저쪽(한국) 성명에 대한 일본 측 생각을 정리해 발표한 것”이라고만 말했을 뿐 더 이상의 보충 설명은 없었다.
한 외교 소식통은 이 담화에 대해 “일본 정부가 자국민을 향해 ‘영토 문제는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 외에는 없다”며 ‘일본 국내용’ 발언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18일 오후 외무성에서 주일 한국특파원을 상대로 담화에 관한 배경 설명을 하면서 한국 측 성명에 대해 당일 외상담화를 발표한 것은 일본 측이 이번 사태를 그만큼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 외무성은 이날 오전 각의에서 외상이 각료들에게 “담화의 취지에 맞춰 미래지향적으로 대처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독도 문제나 역사교과서 문제 등에서 한국을 자극할 만한 발언을 자제해 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겉돈 담화=담화는 서두 절반가량을 최근 한일관계의 개선 상황, 북한 핵문제 등에 대비한 양국 공조와 우호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채웠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사태의 본질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사태를 외면하는 태도 표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어 담화는 △과거사 반성 △재산청구권 △한반도 출신자의 유골 조사 및 반환 △독도 문제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 등을 거론했지만 과거에 비해 진전된 내용은 거의 없다는 지적이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 한국이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을 식민지 침탈의 시작으로 보고 있는 데 대해 일본은 ‘예전부터 양국의 입장차가 있어’라는 말로 일본의 독도 편입 정당성을 확실히 하고 있다.
또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준 역사의 사실’ 운운하는 대목도 1995년 8월 15일 당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의 담화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담화는 배상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일기본조약을 통해 완결됐다는 기존 견해를 강조함으로써 한일 수교 당시 거론되지 않았던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등 문제를 재론하자는 한국 측 주장을 철저히 무시했다.
역사 교과서 검정 문제에 대해서도 일제에 의해 침략 당했던 아시아 국가를 배려한다는 이른바 ‘근린제국’ 조항조차 거론하지 않았다.
도쿄=조헌주 특파원 hanscho@donga.com
▼낯 붉힌 한국… 정면충돌로 가나▼
한일 양국 간 갈등이 점점 확대 재생산되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정동영(鄭東泳)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겸 통일부 장관은 1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를 겨냥해 “한국의 현실을 잘못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장관이 일본 총리를 지목해 비판한 것은 ‘갈 데까지 가 보자’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 이에 대해 윤덕민(尹德敏)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대일 성명을 한국 정치상황 및 여론과 연관지어 해석하는 일본 내 시각에 쐐기를 박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이날 하루 동안 정부와 국회, 정당은 앞 다퉈 강성 발언을 토해냈다. 반기문(潘基文) 외교통상부 장관은 일본 정부의 담화 발표에 대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정 장관이 고이즈미 총리의 1일 발언을 새삼 끄집어내 문제 삼은 데 대해서는 정부 내에서도 의아해하는 반응이다. 정 장관이 전날 대일 성명에서 “(국민 여러분은) 품위와 절제를 지킬 필요가 있다. 국가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해놓고 하루 만에 스스로 이를 어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비해 일본 정부의 담화는 독도 및 역사 문제에 대한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얄미울 만큼 냉정한 톤을 유지했다. 한 외교안보 전문가는 “한일관계가 완충장치 없이 험하게 흘러가는 것은 양국 모두에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런 때일수록 차분하고 신중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그러나 정부는 일본 정부의 역사교과서 검정 결과가 나오는 4월 초까지 강성 기조를 유지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려는 모습이다. 일본이 성의 있는 반응을 보이면 한일관계가 수습 국면으로 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확전이 불가피하다는 각오까지 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가 추진 중인 독도 및 과거사 관련 전담기구 구성이나 시민단체와의 연대 활동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정부가 17일 발표한 대일 성명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문을 참고로 해 만들어졌다는 게 NSC 관계자의 설명이다. 성명에 나오는 ‘대의(大義)’, ‘침략(侵略)’, ‘강권(强權)’이란 용어는 독립선언문 문구에서 그대로 따왔으며, ‘인류 보편적 가치’와 ‘동북아 공동운명체’라는 표현도 인류통성(人類通性)과 시대양심(時代良心), 공존공생(共存共生)이란 단어에 기초했다는 것이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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