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노무현 독트린’이 성공하려면

  • 입력 2005년 4월 4일 18시 47분


노무현 대통령의 ‘동북아 균형자론’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한미동맹도 지키면서 균형자 역할도 하겠다는데 그게 가능한가”에 모아진다. 흔히 “그만한 힘이 없지 않느냐”고 비판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별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다. 힘은 상대적인 것이기도 하거니와 우선은 균형자론의 적실성(適實性)부터 따져보는 게 순서다. 균형자가 되려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고 중립적이어야 할 텐데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동시에 중립적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미국의 대(對)아시아 전략이 구조적으로 이를 용인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아시아가 중국이든 일본이든 어느 한 강대국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으므로 그 틈새를 파고들면 균형자 노릇을 못할 것도 없다. 틈새가 있다면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아시아가 중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면 세계 질서는 미중 양극체제로 갈 가능성이 높다. 미국으로선 원치 않는 상황이다. 중국 봉쇄정책을 펴서 미중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자칫하면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 중국을 미국 지배하의 단극체제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상책이다.

▼균형자論 적실성 따져야▼

그렇다고 일본이 아시아의 패자(覇者)가 되는 것도 미국은 원하지 않는다. 일제(日帝)가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서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의 한 원인이 됐고, 이것이 1941년 진주만 공격과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던 전례가 있다. 미국으로선 미일동맹의 위계질서 안에서 일본이 ‘전략적 보조자’ 역할을 해 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 스럽다.

결국 미국은 아시아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는 한 어떤 형태로든 중일 사이에서 균형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태평양 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물론 때로는 일본 편에 서서 중국을 견제하겠지만 중국을 지나치게 적대시함으로써 이 지역에 ‘중국 대 미일’이라는 신(新)냉전 구도를 낳는 것은 피하고 싶어 한다. 이는 소련 붕괴 후 역대 미국 정부의 변함없는 대중국 정책이기도 하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이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미국이 이처럼 중일 간의 균형자 역할을 한다면 그 틀 안에서 동맹국인 한국도 움직여 볼 여지가 생긴다. 냉전의 유물인 진영(陣營·block)에 더 이상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미국을 이 지역의 전략적 상수(常數)로 놓고, 자신은 하나의 독립변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미국이 ‘큰 균형자’라면 한국은 ‘작은 균형자’가 되는 셈이다.

문제는 균형자론이 성공하려면 미국의 신뢰가 절대적이라는 데 있다. 미국이 믿어 주지 않으면 모든 게 구호에 그치고 만다. 한국이 할 수 있는 균형자 역할이라면 ‘동북아경제공동체’ 구성 발의, 6자회담에 기초한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성’ 제의 등일 텐데 이런 일들이 미국의 신뢰와 지지 없이 가능하겠는가. 자칫하면 망신만 당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은 장차 ‘작은 균형자’로서 활동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이미 몇 가지 조치를 취한 것처럼 보인다. 미국에는 한미동맹을 좀 더 유연하게 가져가겠다고 선언했고(10년 내 주한미군 전시작전권 회수), 중국엔 대중국 봉쇄를 원치 않는다는 신호를 보냈으며(주한미군 기동화 반대), 일본엔 할 말은 하겠다고(독도문제 강경 대응) 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 다지기 부터▼

이런 조치들이 나올 때마다 반응은 불안, 회의, 냉소 일색이다. 미 언론과 지식인들은 노골적으로 비웃음을 보내기도 한다. 이래서는 균형자론을 펴보기도 전에 주저앉고 만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한 고위 관계자는 “뒷날 언론이 균형자론을 ‘노무현 독트린’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며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우리도 자주외교의 상징으로서 멋진 독트린 하나쯤 갖고 싶다. 그러려면 한미동맹부터 다져야 한다.

동유럽의 지식인에게 “공산주의가 뭐냐”고 물었더니 “자본주의에 이르는 멀고도 먼 길”이라고 했다고 한다. 뒷날 “노무현 독트린이 뭐였느냐”고 물으면 “한미동맹에 이르는 멀고도 먼 길이었다”는 탄식을 듣지 않았으면 한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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