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첫 사설(私設) 정치박물관인 이곳에는 제헌국회 방청권, 선거 포스터, 투표함, 투표용지, 당인(黨印) 등 1000여 점의 정치 관련 자료가 전시돼 있었다. ‘못 살겠다 갈아 보자’ ‘갈아 봤자 별 수 없다’ 등의 구호가 담긴 반세기 전 빛바랜 선거 포스터 앞에선 부정으로 얼룩진 이승만 정권 시절의 선거판이 떠올랐다.
박물관은 ‘사라진 과거’의 자료들을 모아 놓는 곳이다. 그런 면에서 돈 선거, 지역주의, 몸싸움, 근거 없는 폭로, 날치기 등 구태(舊態) 정치의 흔적도 이제는 모두 박물관으로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예컨대 대법원이 허위라고 최종 판결한 2002년 대선 당시 김대업 씨가 일으킨 ‘병풍(兵風)사건’은 조작·폭로 정치의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며칠 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한 의원이 들고 서 있던 ‘시간 엄수’ 피켓이나 4·30 재·보선 현장에서 적발된 돈 봉투, 의원들의 바른 언행을 강조한 ‘의원윤리선언’ 등도 박물관행 리스트에 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함께 박물관을 돌던 아이가 ‘의원윤리선언’을 가리키며 “아빠 저게 뭐예요” 하고 물어 올 때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응, 예전에 국회의원들이 지각, 결석을 자주하고 회의 시간에도 자리를 많이 비워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만든 거야. 하지만 지금은 다들 잘 지켜 전혀 필요가 없단다.”
이뿐 아니다. 지금 우리 정치판에는 이미 박물관으로 보내졌어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집권세력이 목을 매고 있는 과거사 청산이나 친일(親日) 진상 규명 작업만 해도 그렇다. 여야 합의로 관련법이 국회를 통과하긴 했으나 수십 년 전의 과거를 캐는 일에 앞으로 얼마나 많은 국력과 행정력을 소모해야 할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진다. 대통령제니 내각제니 하는 권력구조 개편론,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편론, 보수와 진보, 실용과 개혁을 나누는 끝없는 이념·노선 논쟁도 마찬가지다. 마치 건국(建國) 초기의 흘러간 필름을 보는 듯한 이런 정치를 나는 ‘박물관 정치’라고 부르고 싶다.
다른 나라 정치는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 경쟁으로 바쁜데 우리 정치는 언제까지 이미 오래전에 해결돼야 했거나,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가. 이러니 정책이 없는 선동, 이론이 없는 웅변이 활개를 치고 민생과 경제는 날로 멍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9월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에 대해 “칼집에 넣어 박물관으로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대통령의 화법(話法)을 빌려 말하면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박물관 정치’도 이제는 박물관으로 보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우리 정치의 아픈 상처들이 정치 현장에서 훨훨 사라져 버렸으면….
마침 ‘아고라’에는 아직 빈 공간이 많았다.
송영언 논설위원 young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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