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언 의원 16일 글 전문

  • 입력 2005년 5월 16일 14시 34분


죽어라 공부해서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죽어라 놀았다. 그러다 보니 학점은 학사경고 수준을 육박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공부하는 써클에 들어갔다. 훗날 학생운동의 기지 노릇을 하던 대학문화연구회였다. 이영희 교수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여기서 만났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이전까지의 나의 생각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베트남 민족의 자유를 위해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었던 월남 전쟁이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이익을 위해 베트남 민족의 자유를 억압한 조작된 전쟁이었다니! 이것은 미국 국방부의 백서를 통해서 밝혀진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 이후 나는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었던 모든 지식과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회가 내게 줄곧 거짓을 가르쳐왔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것도 지배계급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그랬다는 사실에 치를 떨었다. 나는 점점 싸움꾼이 되어갔다. 부모님과 싸우고, 형제들과 싸우고, 친구들과 싸우며 나는 세상을 증오했다.

돌이켜보면 당시 내 생각의 시계추는 오른쪽 90도에서 왼쪽 90도롤 확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가 군대를 갔다 오고 사회생활을 하며 내 생각의 시계추는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6시 방향 정도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의 시계추가 내려오는 과정은 여기서 생략하겠다.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 혹자는 세상과 타협한 게 아니냐, 배부르고 등 따시면 다 그렇게 되는 게 아니냐 할 것이다. 그런 면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생각의 시계추가 균형을 잡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싸움꾼은 아니다. 헌데 이 사회는 아직도 과거의 나 같은 싸움꾼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니, 너무 많다기 보다는 그들이 득세를 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을 보면 한편으로는 대단하고, 한편으로는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어도 생각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는 게 대단하고, 반면에 두 눈으로 보아도 알기 힘든 세상을 한 눈으로만 바라보고 산다는 게 한심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그들’의 대표선수라 할 것이다. 언젠가 한나라당의 김문수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을 보면 대학교 3학년 때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말이 없다고 본다. 우리나라는 지금 운동권 3학년 학생 수준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생각의 추가 그렇게 극단으로 갔다가 다시 내려오지 못할까? 나는 늘 그것이 궁금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아직도 그 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다 원인과 이유가 있는 법. 그게 무얼까?

혹시 이런 건 아닐까? 유신독재 시절이었다. 유정회라는 웃기는 국회조직이 있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국회의원들이 모여서 만든 교섭단체였다. 이 단체의 대변인으로 J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성명이나 논평은 곡학아세의 표본이었다. 한참 혈기왕성했던 나는 TV에서 이 사람만 보면 죽이고 싶었다. 나중에 세상이 바뀌면 보자. 그 때 길에서 저 놈을 만나면 돌로 패 죽이리라. 10·26이 나고 이 사람은 정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나중까지 잘 먹고 잘 살다가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5, 6공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C일보의 청와대 출입기자가 있었다. 이 사람의 기사는 한마디로 독재권력의 논리 그대로였다. 나는 신문에서 이 사람을 보면 죽이고 싶었다. 세상이 바뀌고 나서 길에서 이 놈을 만나면 대갈통을 부셔버리리라. 그러나 이 사람은 훗날 세상이 바뀌었어도 그 신문사의 부장이 되고 사장도 되었다.

이 두 사람을 생각하면 지금도 용서가 안 된다. 더욱이 짜증나는 것은 이들이 훗날 자신들의 과오를 참회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과거의 잘못을 이유로 자리를 내놓았다는 얘기는 더 더욱 들어본 적이 없다. 바로 이것이 극단으로 간 생각의 추를 다시 내려오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지금 득세한 ‘그들’이 그토록 과거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만약 이것이 어느 정도 옳다면 나는 ‘그들’의 극단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겠다. 극단적인 생각이 번성하는 것은 그것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극단성을 탓하기 이전에 이런 토양부터 바꾸거나 없애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우리 한나라당을 되돌아본다. 우리에게 그런 토양이 없는가 하고. 우리에게 아직도 유정회의 J의원과 C일보의 아무개 기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그러면서 ‘그들’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생각의 극단이라는 것은 방향은 달라도 해악은 똑같은 법. 훗날 우리의 후배들이 그들이 만들어낸 독선의 역사에 대해서 치를 떨며 분노하게 되지는 않을지...

지금 이런 상태라면 꼭 그렇게 될 것만 같다. 욕하면서 배운다지만. 아, 정말 인간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동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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