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보다 이번 사안은 청와대 내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이종석(李鍾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이 관련됐다는 점에서 구구한 추측을 낳고 있다.
▽사건의 전말=지난달 초 대통령국정상황실에서 노 대통령에게 전략적 유연성 협상에 문제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간 것이 발단이었다.
국정상황실은 “정부의 대미(對美) 협상 팀이 미국 측과 이미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를 해놓고 나중에 이를 번복하는 바람에 미국 측과 불필요한 마찰이 일고 있다”고 보고했다.
노 대통령은 NSC 상임위원장인 정동영(鄭東泳) 통일부 장관에게 즉각 확인할 것을 지시했다. 정 장관은 지난달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천호선(千皓宣) 대통령국정상황실장, NSC 이 차장을 불러 이 문제를 점검하는 회의를 열었다.
명목은 ‘점검회의’였지만 이 차장이 질문을 받고 답변을 하는 청문(聽聞) 형식의 조사였다. 지난달 6일 조사에서 분명한 결론이 나지 않자 15일 두 번째 회의가 열렸고 “협상에 문제는 없었다”는 쪽으로 매듭지어졌다.
▽무엇이 문제였나=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한미 양국은 2월 초 안보정책구상회의(SPI)를 열어 한국은 외교통상부가, 미국은 국방부가 협상 파트너로 나서기로 합의한 뒤 지금도 논의를 진행 중이다.
김숙(金塾) 외교부 북미국장이 팀장을 맡고 있고 NSC, 외교부, 국방부 실무자들이 협상 팀에 참여하고 있다. 물론 협상 팀 지휘는 이 차장이 맡아왔다.
2월 초 정부 협상 팀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SPI와는 별도로 최대한 신속하게, 철저하게, 비공개로 협상을 진행하겠다는 세 가지 원칙을 내놨다. 이 때문에 정부가 미국의 요구를 다 수용해놓고 형식적인 협상을 벌이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제기됐고 졸속 협상이 우려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런 와중에 노 대통령은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시아의 분쟁에 휘말리는 일은 없다는 것이 어떤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한 원칙”이라고 협상 가이드라인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바로 다음날 ‘청와대 브리핑’은 “이는 전략적 유연성을 조건부로 인정한 것”이라며 “주한미군 병력의 이라크 차출과 같이 동북아 지역 이외의 파견은 용인하되 동북아 지역으로의 이동은 불가하다는 것”이라고 구체적인 예도 들었다.
국정상황실의 문제 제기는 실무 협상이 노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충실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따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최초 문제 제기는 누가?=정부 협상 팀을 문제 삼은 국정상황실은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모으는 곳이다.
문제를 제기했던 지난달 초에는 방위분담금 감액에 대한 주한미군의 반발, 전쟁예비물자 폐기, 작전계획 5029 논란 등 한미동맹의 이상 기류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사건이 줄줄이 터지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외교안보라인 내 개혁적 성향의 인사들이 “NSC가 주도하는 협상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NSC 핵심 관계자도 “외부에서 문제 제기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해 청와대 안이 아닌 바깥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미 2월 초 쯤에 “한국 정부가 하도 말을 자주 바꿔 미국 측에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미국 측의 불만이 국내의 정보망을 통해 국정상황실 쪽에 전달됐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내부 파워 게임?=이 차장이 도마에 오른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청와대 내에서 “이 차장이 관련 부처와의 조율 과정에서 독주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번의 경우도 민정수석실과 국정상황실이 NSC를 견제하고 나선 형국이었다.
노 대통령이 정 장관에게 ‘점검’ 역할을 맡긴 것도 앞으로는 정 장관이 직접 협상 조정 업무를 챙기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이 차장의 입지가 그만큼 약화됐다는 얘기다.
반대로 외교안보라인의 한 관계자는 “전략적 유연성 협상은 아직 초기단계여서 무슨 합의나 번복이 있을 만한 계제가 아니다”라며 “국정상황실이 부정확한 정보를 갖고 평지풍파를 일으켰다”고 주장해 양측 간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국정상황실의 문제 제기는 정당한 것이었고, 청와대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라고 밝히고 있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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