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빛이 찬란한 그날까지 너의 뜻 길이 남으리’
‘5월 광주’는 1980년대 한국 사회의 깊은 내상(內傷)이었다. 상처는 잠복한 채 파열을 계속했다. 분노와 좌절 그리고 ‘5월 광주’를 몰랐던, 또는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부채(負債) 의식은 수많은 젊은이들을 ‘혁명의 전위(前衛)’로 끌어냈다. 관념적 좌파 및 친북 주사파(主思派)가 양산됐고, ‘반미(反美)와 체제 전복’은 그들의 어깨에 붙은 불온한 견장(肩章)이었다. 386그룹은 그런 1980년대의 복판을 관통했다.
1987년 6월, 그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승리의 과실(果實)은 곧바로 기성 정치세력에 넘어갔고 다수의 386그룹은 ‘운동’을 떠나 현실로 돌아왔다. 그렇게 분화된 386그룹의 한 지류가 2002년 정권을 잡았다. 그들에게는 마침내 ‘푸른빛이 찬란한 그날’이 찾아온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내 이름을 판 것 같다”▼
1982년 고교 3년생 이광재(李光宰)는 학기말 시험을 치른 뒤 친구 2명과 무전여행을 하던 중 광주 망월동 묘역을 찾았다. 그때 그는 “다시는 광주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열린우리당 이광재 의원 홈페이지에서).
그로부터 5년이 지난 1987년 이광재는 부산에서 ‘인권 변호사 노무현’과 운명적 만남을 이룬다. 그 후 그는 ‘노무현의 오른팔’이 되어 의원 보좌관, 대통령후보 선거단 및 당선자 기획팀장,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등 요직을 거친다. 지난해 총선에서 국회의원(강원 태백-영월-평창-정선)이 된 후에도 그는 대통령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다.
말 그대로 ‘실세(實勢)’인 것이다. 그 ‘실세’가 지금 러시아 유전개발 투자 의혹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억울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처지가 눈을 가리고 원을 그리며 제자리를 맴도는 ‘원형방황(圓形彷徨)’이라고 한다. 검찰이든 특검이든 빨리 자신의 결백을 밝혀 달라는 것이다.
물론 아직 진실은 모른다. 그가 정말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는 광주를 배신하지 않겠다’던 초심(初心)에 비춘다면 그는 유죄(有罪)다. 나이 마흔에 ‘실세’로 이름이 팔린 것만으로도 유죄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부동산업자(전대월)에게 ‘대통령의 선생님’(이기명)에게서 소개받은 유전 전문가(허문석)의 연락처를 알려준 것밖에 없다고 한다.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모두 “누군가 내 이름을 판 것 같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철도청 사업개발본부장(왕영용)이 의욕을 갖고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광재’를 팔았거나 아니면 ‘이광재’를 팔고 다닌 사람에게 이용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식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에서 밝혀지고 있는 ‘오일 게이트’ 관련자들의 어지러운 말 바꾸기와 거짓말 행진을 보면 ‘이광재 이름 팔기’만으로는 가당찮다. 하기야 ‘이광재 이름 팔기’만으로 당시 철도청장(김세호)이 총대를 메고, 산업자원부 장관(이희범)이 보고를 받고, 우리은행장(황영기)이 거액을 대출해 주고, 청와대 보고라인이 먹통이 됐다면 그것은 더욱 가당찮을 노릇이다.
▼위기의 본질 제대로 읽어야▼
YS(김영삼) DJ(김대중) 정부에서 실세는 대통령 아들과 가신(家臣)이었다. 그들의 인치(人治)가 법치(法治)를 훼손하고 끼리끼리식 부패와 국정 문란을 초래한 것은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노 정부의 실세는 대통령과 코드가 맞는 ‘이념적 동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 아들과 가신에서 이념적 동지로 실세의 성격이 바뀐 것은 수직적 권력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의 전환인가. 그것도 현 정부가 내세우는 분권(分權)의 현상인가.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름만으로도 국정시스템을 망가뜨리는 실세가 버젓이 존재하는 한 참여와 개혁은 한낱 공허한 구호일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은 집권 중기(中期)에 드러난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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