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원동지 여러분께 드리는 편지] 전문

  • 입력 2005년 6월 28일 09시 29분


당원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최근 당이 어려움을 겪고 흔들리는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곰곰이 보면 우리 당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라정치 전체가 어려움에 빠진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역량부족 탓인가 싶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당과 나라정치의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을 드리고자 합니다.

당이 어려움에 처한 데는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도덕적 신뢰의 상실, 대세의 상실, 당의 구심력의 부재라고 할 것입니다.

유전개발 의혹, 행담도 사건이 가장 치명적인 사건일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대통령과 가까운 사람 그리고 청와대 참모가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미안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대통령도 특검이든 국정조사든 모든 조사를 수용하고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이외에 달리 어찌할 방안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전에라도 당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할 방도가 있는지도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그 사람들이 어떤 실책을 범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금전이나 이권이 걸린 부정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 당은 행정수도 위헌판결, 4대 개혁법안 저지, 보궐선거 패배를 거치면서 정국의 대세를 놓쳐버렸습니다. 집권당이 대세를 잃으면 문제해결능력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잃는다는 것은 정치현실의 기본원리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관하여는 몇 가지 실책을 원인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보다 본질적 원인은 당의 구심력이 문제라는 진단에 대해 별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책도 주로 당의 구심에 관한 의견들입니다.

당정분리의 재검토, 대통령의 적극적인 역할과 접촉의 강화, 긴밀한 당정협의, 이른바 차기 주자들의 복귀, 현 지도부의 인책론에 이르기까지 당의 구심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근본적인 해결 방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이 문제에 관해선 따로 별지를 붙여 저의 생각을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저는 당의 구심력을 세우려면 당원 여러분의 태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한 논리에 충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기존의 봉건적 정당질서를 청산하고 사회적 가치지향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수평적 관계를 맺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민주정당을 만들기 위해 함께 했습니다. 많은 당원들이 정치생명을 거는 정치적 결단을 거쳐서 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결단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주정당의 당원으로서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당 의장이나 원내 대표가 가진 권한은 당 정책과 전략을 말하고 협상하고 그리고 타협하는 권한 밖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소속의원들이 지도부의 판단이나 협상결과를 비판하고 흔들어서는 어떤 지도부도 제대로 위신을 유지하고 전술을 구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당의 중요한 정책이나 원칙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이를 적절하게 발표하고 협상에서 타협을 이루어 내는 이른 바 전략과 전술의 운용은 지도부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중한 절차를 거쳐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상 지도부의 판단을 존중하고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합니다.

책임을 묻더라도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임기단위로 물어야 합니다. 임기 전에 책임을 물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더라도 대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당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문제를 남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당원 각자가 먼저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이 어려울 때일수록 스스로 원칙을 지키고 열심히 참여하고 책임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지역구 관리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한강물을 바가지로 다 퍼 담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당원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결국 당은 설 땅이 없을 것입니다. 당원 모두가 당에 열심히 참여하고 국민들에게 봉사하는 일을 찾아서 할 때 당이 살고 모두가 사는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개인의 당락에 연연하지 않고 당과 나라를 위하여 헌신할 때 오히려 모두가 사는 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야말로 사즉필생입니다.

당정협의는 행정 각부가 보다 성실하게 하고 총리가 이를 총괄하여 불편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총리의 국정 통할권을 확실하게 뒷받침 하겠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제와 달라서 우리 국민들은 정책 주도권을 당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아주 강한 것 같습니다. 당도 그에 맞추어서 정책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당의 주도권을 실효성 있게 하기 위한 방안도 당과 협의 하겠습니다.

일희일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치도 인생도 장거리 경주와 같습니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김대중 대통령이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2002년 저 또한 지자체 선거에서 참패하자 모두들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기회는 또 있었습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습니다. 혁신이론에서도 위기감에서 혁신이 시작되고 혁신이 성공의 기회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기회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기 나름입니다. 기회를 살려나갑시다.

2005. 6. 27.

대통령 노무현

▣별지

당정 분리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방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대통령과 당의 분리는 대통령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만든 것이고 이미 당헌 당규로 제도화되어 있습니다.

누구도 함부로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당에 대한 대통령의 역할 강화를 주장하는 국회의원 어느 분도 옛날처럼 대통령의 지시 통제를 받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과거 당 총재의 권력을 되돌려 줄 생각도 없을 것입니다. 어렵다고 하여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인 것 같습니다.

정무수석을 부활하거나 대통령이 당 소속의원들을 자주 만나 대화와 설득으로 당의 단합을 이끌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물론 대통령도 당 중진의 한사람으로서 당원들을 만나 의견도 나누고 조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효과는 적고 부작용은 큰일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 후 한 두 차례 그렇게 해 보았으나 당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분란의 소지만 제공하는 결과가 된 것 같았습니다.

또 저의 경험상 원내 전략이나 공천 등 당 운영에 관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관하여 대통령의 생각이 당 지도부의 생각보다 더 우수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원칙도 아닐 뿐 아니라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더 클 것을 걱정하여 저는 당무에 대한 간섭을 엄격히 절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책에 관하여는 총리와 내각을 중심으로 충분한 협의가 가능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대통령제와 달리 우리는 당정협의와 당론투표의 전통이 강하여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대통령이 총리에게 일상국정의 권한을 대폭 위임한 것은 당정 분리의 구조 하에서 당이 국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필요하면 총리의 권한이나 당의 역할을 보다 강화하는 보완도 가능할 것입니다. 당정 분리의 원칙 위에 총리를 중심으로 한 당정일체의 구조를 지켜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무수석의 부활 문제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당무나 정책의 문제를 떠나서도 당내 의원들과 자주 만나 정서적 일체감을 높여야 한다는 요구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현실적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나면 자연스럽게 당과 정국운영에 관한 문제, 정책에 관한 문제가 화제가 되고 공식적인 의견과 혼선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당정 분리가 정착되고 나면 자연스러운 대화의 기회를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만 한 때 당 지도부 인책론이 거론되고 있다는 보도를 본 일이 있습니다. 취임 한달도 안 되는 지도부에게 무슨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지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당 내에서 나온 말은 아닐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김근태, 정동영 장관 같은 분들을 당에 복귀시키라는 주장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당 문화에서라면 그 분들의 지도력이 당을 살리기 보다는 몇 달 못가서 상처만 입히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 분들이 그 동안 당에 있었더라면 당 운영과 이번 보궐선거 과정에서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권한도 없는 지도자에게 무한대의 능력과 책임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당원 각자가 주인 의식을 가지고 당무에 적극 참여하고 지도자를 도와서 키워나가는 당의 문화가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원내 정당화, 중앙당 슬림화, 이런 말이 우리 정당이 지향해야할 당연한 방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래 전부터 이 논리에 반대해 왔습니다. 민주주의를 하려면 정당이 대중적 토대를 가져야 합니다. 정당이 대중적 토대를 가지지 않으면 당내에서부터 민주주의의 토대를 가지지 못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걷기도 전에 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 정치를 원내 정당정치의 모델로 삼아 나온 이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어느 나라도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지도자와 그 추종자들로 급조된 붕당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하여 조직과 지지 양면에서 단단한 대중적 기반위에 서 있는 민주적 정당을 가지고, 그 당 조직과 지지기반 위에서 그야말로 명실상부하게 상향식으로 당직과 공직선거 후보를 선출하는 관행이 정착되어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민주정당의 토대를 먼저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중앙당의 당원관리, 교육 연수, 당내 선거관리 등의 기능은 강화되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중앙당 인원의 양적인 규모는 최대한 슬림화해야 하지만 권한과 기능은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원내 정당화는 민주정당의 대중적 토대가 갖추어진 다음에 당의 효율적 운영의 차원에서 천천히 검토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지금과 같이 국회의원 당선자가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구조에서 원내정당화는 나머지 지역의 당 조직과 지지기반을 완전히 포기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최근 정부 내에 낙선한 원외인사의 기용을 놓고 대통령이 여론의 매를 맞고 있습니다. 그에 반하여 당에서는 원외인사의 기용에 대하여 남의 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원외 인사 기용은 지역구도 극복이라는 간절한 목표를 실천하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내가 몸담았던 정당은 영남에서 지지가 없다보니 명망 있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않고 그러다보니 선거 때가 되면 인물이 없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정치라는 것이 국회의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당내에서도 자연 소외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악순환이 되다보면 지역구도는 더욱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작은 인사 하나라도 지역구도 극복에 기여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을 기용하여 나라 일을 그르치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당에서도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시고 저의 이런 뜻을 이해하고 수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당권이 민주화되고 당의 구심이 분산될수록 당의 원칙과 규율을 강화하고 지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민주주의와 중구난방은 다른 것입니다. 당원의 자유와 자율권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원칙과 약속은 지켜져야 합니다. 최소한의 규율도 기강도 없는 당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당 지도부와는 별개의 조직으로 당의 기강을 관리하는 강력한 권위와 권한을 가진 기관을 설치하는 방안을 건의합니다. 진지한 검토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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