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담 상대방을 ‘폭정의 거점’이라고 전면 부정하는 조건에서 6자회담에 나갈 어떤 명분도 없다.”(2월 10일 북한 외무성 핵 보유 선언)
“미국은 (우리를)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6자회담 안 쌍무회담을 할 것이란 태도를 표명했다. 이를 ‘폭정의 거점’ 발언 철회로 이해한다.”(7월 9일 조선중앙TV 6자회담 복귀 선언)
5개월 만에 북한의 태도는 이렇게 180도 달라졌다. 이 기간에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가 단 한 번도 “폭정의 거점 발언을 취소한다”거나 “그에 대해 사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한국 정부의 한 관계자는 “원래 외교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은 미국의 최근 침묵을 ‘발언 철회’로 받아들이고, 미국은 북한의 그런 해석에 눈감아 주는 것이 ‘윈윈 게임’의 타협점이 됐다는 뜻이다.
이 발언의 주인공인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도 10일 중국 방문 중 “북한의 주장대로 ‘폭정의 거점’ 발언을 철회한 게 맞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북한 정권에 대한 미국의 견해는 모두가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북한이 ‘폭정의 거점’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 6자회담 재개 국면에 찬물을 끼얹지 않겠다는 의사가 읽힌다.
그렇다고 1월 18일 라이스 장관의 상원 인준 청문회 발언에서 시작된 북-미 간 ‘폭정의 거점’ 공방이 일단락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불씨가 꺼지지 않은 채 잠복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한다.
김정일(金正日) 정권을 폭정으로 보는 부시 행정부의 기본 시각이 확고한 만큼 언제 어느 곳에서 ‘폭정의 거점’ 발언이 재등장할지 알 수 없고, 북한도 전략적으로 필요하다면 ‘미국의 검은 본심이 다시 드러났다’고 문제 삼을 가능성이 적지 않기 때문.
윤덕민(尹德敏)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북한이 ‘폭정의 거점’ 발언 철회를 회담 복귀 조건으로 내세웠던 것은 북-미 양자회담에 대한 보장을 받으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얻을 것을 얻자 스스로 조건을 거둬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
일본 마이니치신문도 11일 “이근(李根) 북한 외무성 미주국 부국장이 이달 초 미국 뉴욕의 한 토론회에서 조지프 디트라니 미 국무부 대북협상대사에게 ‘폭정의 거점’ 발언 철회 또는 사과 여부를 타진했다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단념했다”고 보도했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