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에서는 23일부터 홍 대사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급변했고, 청와대도 25일 오전 고위급 핵심 참모 모임인 ‘정무(政務)관계 수석비서관 회의’를 열어 홍 대사 문제를 집중 논의키로 했다.
당초 여권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자”며 ‘선(先) 진상규명’이라는 원론적인 대응에 그쳐 왔다. 그러나 22일 저녁 MBC가 9시 뉴스를 통해 홍 대사의 실명을 거론하며 ‘X파일’의 내용을 보도한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집중적으로 보도하자 ‘신속한 대응’ 쪽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X파일의 내용이 비록 8년 전의 일이지만, 현 정부가 최우선적인 개혁 과제로 꼽아 왔던 과거의 ‘정경유착’, ‘정언(政言)유착’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여권으로서는 더 이상 모른 체하기가 어려워진 상황이다. 녹취록에 따르면 홍 대사는 그 ‘정경유착’의 주역인 것으로 돼 있다.
청와대나 열린우리당 어느 쪽에서도 홍 대사를 옹호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북핵 6자회담이 재개되는 상황에서 주미대사를 바꿀 수 있느냐’는 유일한 방어 논리도 무너지는 분위기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6자회담 재개라는 중요한 대미(對美) 현안이 있긴 하지만, 6자회담 문제는 주미대사의 업무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고 선을 긋기도 했다.
이처럼 여권의 기류가 급속하게 바뀐 데에는 안기부 녹취록 파문을 방치한 채 미적거릴 경우 그 후폭풍이 간단하지 않으리라는 정치적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안기부 녹취록의 내용은 주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대한 대선자금 지원 문제이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진영에도 돈을 전달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이 후보 진영의 경우 ‘세풍(稅風) 사건’을 비롯해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선 자금에 대해 모두 사법적 심판을 받았다.
따라서 무작정 ‘진상규명’만 밀고 나갈 경우 자칫 김 전 대통령 쪽을 건드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경우 이미 두 차례 ‘망신’을 당한 한나라당보다 김 전 대통령 측이 오히려 더 곤혹스러워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더욱이 김 전 대통령 부분을 건드리면 가뜩이나 악화된 호남 민심을 더욱 자극할 우려도 있다. 이래저래 여권으로서는 파문의 확대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 대사를 계속 껴안고 있다가는 현 정부가 홍 대사를 주미대사라는 요직에 발탁한 배경 쪽에 논란의 초점이 맞춰질 가능성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홍 대사와 현 여권 간의 커넥션 의혹 등이 거론될 경우 여권이 안게 될 부담이 만만치 않은 것.
벌써부터 여권 내에서는 ‘도대체 누가 홍 대사를 천거했느냐’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등 책임론 문제도 불거지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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