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洪錫炫) 주미 대사는 사의를 표명한 지 하루 만인 26일 오전(미국 시간) 워싱턴 대사관에서 기다리고 있던 특파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X파일’ 공개 나흘 만이다.
어느 정도 생각을 정리한 듯 특파원들이 심경을 묻자 그는 웃으면서 “담담하다. 얼굴 좋지 않으냐. 오히려 특파원 여러분이 고생하셨다”고 위로하기도 했다.
홍 대사는 이어 “이번 일이 우리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기폭제가 됐으면 좋겠다”며 “이번 일로 많은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남긴 것 같아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대국민 사과를 연상시키는 발언이었다. “상처받은 분들에게는 용서를 구할 뿐이다”라는 말도 했다.
MBC가 X파일을 처음 공개한 직후인 21일 오전과 오후, 그리고 22일 아침만 해도 홍 대사는 여유를 보였다.
국제경제연구소(IIE) 오찬은 물론 학계 인사들과의 오후 면담 일정도 모두 소화했다.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자연스럽게 열린우리당 쪽에서 총대를 메고 나서는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다음날인 23일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이번 사안은 대통령이 결정하기 어렵다. 홍 대사가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며 압박에 나섰다.
여당 지도부에서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 문제에 직접 관여하는 양상이 벌어졌고, 이 때문에 청와대에서도 모양새를 어떻게 갖출 것이냐는 문제만 남았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홍 대사가 부인과 함께 워싱턴 근교에 머무르고 있던 지난 주말 국내에서는 홍 대사의 거취 문제가 초읽기에 들어갔다.
열린우리당 문희상(文喜相) 의장이 25일 공개적으로 자진사퇴를 거론하고 나섰다. 이날 오전 대통령수석비서관 및 보좌관 회의에서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처음으로 “법적 도덕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게 국민 여론”이라는 취지로 사실상 홍 대사에게 사퇴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날 삼성은 임직원 명의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주말 여행에서 돌아온 홍 대사는 심신이 몹시 지친 상태에서 관저에 머무르다 25일 아침(한국 시간 25일 밤) 김우식(金雨植) 대통령비서실장을 통해 노 대통령에게 사의를 전달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워싱턴 쪽과는 어떤 의견 교환도 없었다”고 말했지만 청와대의 의중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반영된 결과였다.
홍 대사의 사의 표명 소식에 대사관 관계자들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이다. 일부 직원들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하려던 때였다”며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태생적 한계’가 많았고, 본인은 물론 노 대통령이나 청와대도 ‘홍석현의 한계와 이력’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워싱턴=권순택 특파원 maypole@donga.com
김정훈 기자 jng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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