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피플]한국 명예영사로 뛰는 외국인들

  • 입력 2005년 7월 29일 03시 1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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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멘 아브라미안 아르메니아 명예영사(47). 예레반국립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국세청에서 12년간 근무했다. 예레반·바쿠=김기현 특파원
아르멘 아브라미안 아르메니아 명예영사(47). 예레반국립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국세청에서 12년간 근무했다. 예레반·바쿠=김기현 특파원
2월 러시아 제2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국 유학생 3명이 극우파청년(스킨헤드)들에게 폭행을 당해 크게 다쳤다. 모스크바에 있는 주러 대사관의 담당 외교관이 즉시 사고 현장에 가기는 힘든 상황. 현지의 고려인 동포인 김기음(알렉산드르 김) 명예총영사가 먼저 현장에 도착해 사고 수습에 나섰다.

한국의 국익을 위해 뛰어다니는 현지인 명예영사(honorary consul)들의 열정은 직업외교관 못지않다. 한국 정부가 선임한 명예영사는 모두 122명. 이들은 봉급도 없고, 외교관의 특권도 없는 명예직이지만 자기 시간과 돈을 써 가면서 한국을 알리고 위급한 사건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뛰어간다.

‘외교 사각지대’의 첨병인 셈이다. 지난해 9월 현재 한국은 186개국과 수교하고 있지만 예산과 인력의 부족으로 대사관과 총영사관은 95개국 130개밖에 없는 상태. 공관이 없는 지역은 가까운 공관에서 겸임하지만 자칫 외교활동이 소홀해지기 쉽다. 또 언제 한국이나 우리 국민과 관련된 긴급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이 때문에 공관이 없는 국가나 도시에 명예영사를 두고 있다.

특히 옛 소련 지역은 명예영사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 꼽힌다. 이 지역 15개국에 우리 공관은 5개밖에 없어 7명의 명예영사를 두고 있다.

술레예만 이브라히모프 아제르바이잔 명예영사(48). 러시아 외교아카데미 출신으로 외교관을 거쳐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에서도 있었다.

○ 태극기 휘날리고…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 중심가 바흐라냔 거리. 태극기가 걸린 2층짜리 석조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건물 정문에는 한국어와 아르메니아어, 그리고 영어로 대한민국영사관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지난해 11월 임명된 아르멘 아브라미안 명예영사는 단독 건물의 영사관을 자비로 마련했다. 자신의 벤츠 승용차에도 꼭 태극기를 달고 다닌다. 그 덕분에 우리 교민이 겨우 4명뿐이지만 한국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브라미안 일가는 아르메니아에서 손꼽히는 명문가로 형제들이 모두 친한(親韓)인사로 유명하다. 아브라미안 영사는 둘째형으로부터 명예영사 자리를 물려받았다. 2002년 10월부터 일해 온 가기크 아브라미안 전 명예영사가 개인 사정으로 5년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자 동생이 대신 나선 것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맏형 아라 아브라미안 콩코드그룹 회장은 한러친선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아브라미안 영사도 영사관 개설 당시 모스크바에서 전세기를 띄워 한국 인사들을 초청할 정도로 형들 못지않게 한국과 관련된 일이라면 열성적이다.

하지만 양국 교류가 기대만큼 활발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있다. 최근 한국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구입하려 했지만 결국 구하지 못하고 일제차를 샀다. 그는 “명색이 한국 명예영사인 내가 일제차를 타서야 말이 되느냐”며 한국기업의 아르메니아 진출을 호소했다. “내가 앞장서서 도울 테니 걱정 말고 들어오라”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 외무장관이 친구

아르메니아의 이웃나라로 최근 카스피해 유전 개발 바람이 불고 있는 아제르바이잔에도 5월 술레예만 이브라히모프 AB스탠더드 부회장이 명예영사로 임명됐다.

옛 소련 외교관에서 기업인으로 변신한 그는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없는 사람이다. 한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정도다. 친구인 엘마르 마하람 맘마댜로프 현 아제르바이잔 외무장관이 1월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후 “한국 명예영사를 맡으라”고 권한 것이 계기가 됐다.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극동지역에 관심이 많던 이브라히모프 영사는 뜻밖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한국과 아제르바이잔의 관계가 곧 빠른 속도로 발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슬람 시아파 종교지도자 가문의 후예지만 낯선 한국을 먼저 ‘문화적으로 이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지난달 바쿠에서 열린 한국문화주간을 통해 접한 한국 미술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서구인들보다 한국사람들과 쉽게 친해지는 것 같다”며 “한국 방문 일정부터 잡아야겠다”고 말했다.

두 명예영사가 가장 바라는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하루빨리 한국대사관이 현지에 들어오는 것이다. 공관이 문을 열면 자신들은 명예영사 자리를 내놔야겠지만 그런 섭섭함보다는 한국과의 관계가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다.

예레반·바쿠=김기현특파원 kimkihy@donga.com

:명예영사:

본국에서 파견하지 않고 상대국에 있는 자국민이나 상대국 국민 중에서 선발한 영사. 직업 외교관 영사(career consul)와는 달리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으며 봉급을 받지 않는다. 대개 현지의 유력한 상공인 중에서 선임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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