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란, 시퍼런 칼을 비단으로 감싸는 것”

  • 입력 2005년 7월 30일 03시 11분


‘날이 시퍼런 칼을 비단으로 감싸는 것.’

혹자는 외교를 이렇게 말한다. 흔히 외교라고 하면 깔끔한 외모, 화려한 화술, 우아한 파티를 떠올리지만 그 이면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제4차 6자회담이 열리고 있는 중국 베이징(北京) 댜오위타이(釣魚臺)에선 지금 베테랑 외교관들이 ‘칼을 감춘 전쟁’을 하고 있다.

○ 2도 차가 200m 차로

29일 한국과 북한, 미국은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온종일 입씨름을 벌였다. ‘관계 정상화(normalized relation)’를 두고 정상화된 관계, 정상 관계, 균형 잡힌 관계 등 어떤 표현을 쓸지 힘겨루기를 했다.

일반인이 보기엔 다 같은 표현이지만 외교관들은 미세한 뉘앙스까지 신경 쓴다. 용어 하나가 나중에 엄청난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6자회담에 참석한 한 대표는 이를 골프에 비유했다. “골프공을 2도만 빗맞혀도 낙하지점에서는 200m나 벗어나지요.”

○ 헷갈리는 외교관의 말

단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온종일 고심하지만 막상 외교관의 발언은 애매하기 이를 데 없다. 외교관이 ‘예(yes)’라고 말하면 ‘아마(perhaps)’, ‘아마’라고 하면 ‘아니요(no)’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외교관은 더 이상 외교관이 아니란다. 외교관은 ‘절대로’ ‘반드시’ ‘결코’ 등과 같은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만큼 말이 부드럽다.

○ 공개보다 비공개가 더 많아

외교의 또 하나 ‘원칙’은 비밀 엄수다. 이번 6자회담에서 다뤄진 내용도 골자는 알려지지만 일반인이 영원히 모르고 넘어가는 부분이 더 많을 수 있다.

이전 1∼3차 6자회담에 참석했던 L 씨. 그는 올해 초 6자회담 경험담을 책으로 펴내기 위해 원고를 썼다. 기존 신문 보도를 뛰어넘는 비화(秘話)를 넣겠다는 의욕으로 초고를 완성하고 보니 실제 보도 내용과 너무 달랐다. 그래서 다시 쓰기를 네 번. 그러다보니 신문에 나온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더란다. 결국 출판을 하지 못했다.

정상회담과 같은 주요 국제 외교가 끝나면 당사자들은 어느 수준까지 언론에 공개할지 정한다. 비보도 부분에 대해서는 무덤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게 외교관의 숙명이다.

○ 조율의 마술

김하중(金夏中) 주중 한국대사는 27일 “회담 중 가장 중요한 게 ‘물밑 회담’”이라고 말했다. 이날 6자회담 전체회의 기조연설에서 참가국 대표들은 자신들의 안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이런 공개 논의보다 중요한 것은 물밑 회담(이번의 경우 양자회담)을 통해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는 작업이다.

이를 두고 한국 측 수석대표인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는 “글자 뒤에 감춰진 뜻을 들추어내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나면 공동합의문 초안을 만든다. 글로 남길 때는 말로 할 때와 달리 신경이 곤두선다. 본국에 보고하고 훈령을 받는 것도 이때다. TV에는 깔끔한 정장차림만 비치지만 이 시점의 외교관은 사실 칼만 안 든 군인이다.

○ 외교관은 시인(詩人)

26일 6자회담 개막식 기조발언을 앞두고 송 차관보는 딱딱한 기조발언을 어떻게 잘 소화할지 고민하다 비유법을 쓰기로 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위대한 발견의 길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땅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는 말을 떠올렸다.

송 차관보는 통역들에게 일일이 영어 원문을 알려주며 정확한 번역을 부탁했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아서 골드버그 씨는 “외교관은 가장 불쾌한 일을 가장 은근한 방법으로 말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외교관이라면 분위기를 주도하기 위해 멋진 시구나 농담 몇 개는 외우고 다닌다.

베이징=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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