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한 관계자는 21일 작금의 도청 정국과 관련해 국정원이 처한 상황을 ‘경술국치(庚戌國恥)’에 빗대어 이렇게 자탄했다. 국정원 직원들의 무력감이 최악에 이른 상황이다.
국가안전기획부 및 국정원의 불법 감청(도청) 사실로 국정원은 사상 초유의 검찰 압수수색을 받았다. 김대중(金大中) 정부 시절의 국정원 도청 사실 공개와 관련해 열린우리당에선 국정원의 ‘정치감각 부재’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 때문에 김승규(金昇圭) 국정원장의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애초 DJ정부 시절의 국정원 도청 사실 공개는 김 원장의 판단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은 안기부 미림팀의 도청 녹취록이 공개된 직후 과거와 현재의 도청에 대한 내부 조사 결과를 놓고 7월 말 고위 간부들이 참석한 대책회의를 몇 차례 열었다고 한다.
DJ정부 때 휴대전화 도청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논의의 핵심이었다는 것. 일부 이론이 있었으나 김 원장은 “보안 유지가 가능하겠느냐”며 ‘공개 불가피’ 의견을 냈다고 한다.
실제 국정원 내부의 정보가 한나라당에 유출된 사건이 몇 차례 있었다. 이에 따라 국정원은 공개 쪽으로 입장을 정리해 청와대에 보고했고, 청와대 측도 망설임 없이 “사실대로 밝혀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는 전언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는 그 후 윤후덕(尹厚德) 기획조정비서관을 통해 두 차례 DJ 측을 접촉해 사전 설명을 했지만 원칙을 바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일 처리 자체는 ‘정치적 고려’를 배제하고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게 중론이다.
하지만 열린우리당 측은 ‘정치적 고려가 없었다’는 점을 오히려 문제 삼아 김 원장을 비판하고 있는 것. 김 원장이 정치 상황에 대한 정교한 준비 없이 발표를 서둘러 전·현 정권의 갈등을 유발했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는 대놓고 청와대를 비판하기가 껄끄러운 여당 의원들이 김 원장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는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18일 언론사 정치부장 간담회에서 “국정원의 발표 내용이 부실한 것 같았다”는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공개적인 발언도 국정원을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여권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김 원장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원장이 여권 내에서 처한 사면초가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지 주목된다.
정용관 기자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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