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협정 외교문서]美, 고비마다 ‘보이지 않는 손’ 개입

  • 입력 2005년 8월 27일 03시 05분


13년 8개월에 걸친 한일회담은 미국의 그림자 아래서 진행된 사실상의 ‘한미일 회담’이었다.

6·25전쟁 중에 반공진영의 결속을 명분으로 한일수교를 재촉했던 미국은 이후 한국과 일본 정부가 청구권 총액과 명목을 두고 틈이 벌어질 때마다 봉합하는 데 애썼다.

일본이 1945년 미군정 명령 제33호로 한국에 귀속된 일본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요구해 한일회담이 고비를 맞자 미국은 이 명령의 효력을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를 재해석한 각서를 양국에 보냈다. 1957년 12월 31일자 미 국무부 각서는 “일본은 대한(對韓)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다”며 사실상 한국의 손을 들어줬고, 일본은 청구권을 철회했다.

1962년 김종필(金鍾泌)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10월 20일 일본 외무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와 청구권 총액을 놓고 회담을 했지만 합의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11월 12일 다시 오히라를 만나 총액 타결을 하고 역사적인 ‘김-오히라 메모’를 남겼다.

두 회담 사이인 11월 4일 주일 한국대표부가 외무부 장관에게 보낸 공문에는 김종필 부장이 미국에 가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을 만나 회담을 했다고 적혀 있다. 러스크 장관이 한일 양국이 양보할 수 있는 최종 액수를 파악한 뒤 ‘3억 달러+α’ 선을 제시해 협상 타결을 유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64년 2월 28일 주미 한국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문서에서 러스크 장관이 “국교 정상화는 한국에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며… 5월 중순 일본 국회 회기가 끝나기 전에 교섭이 종결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해 7월 10일 에드윈 라이샤워 당시 주일 미국대사는 “회담의 조기 타결이 어려우면 주한 일본대표부의 설치를 수락해 사실상 외교 관계를 정상화해 나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밝혔다.

1965년 4월 29일 윌리엄 번디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는 주미대사와의 면담에서 “(박) 대통령 방미 전에 조인을 실현하는 것을 강력히 희구하고 있다. …한일조약의 조인과 같은 중대한 계기 없이는 (한국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위해) 국회를 납득시키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1964년 번디 차관보가 방한했을 때 양달승(梁達承) 대통령정무비서관은 ‘미국 내에 (한일협상 관련) 코리안 로비팀을 만들어야 한다’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이번 공개 문서를 분석한 이원덕(李元德) 국민대 교수는 “한일회담과 관련한 미국 측의 방대한 문서를 파헤치면 미국의 영향력이 더욱 깊고 컸음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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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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