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12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통과되자 소련의 압박은 극에 달한다. 하루는 스티코프 극동사령부 정치위원이 고당을 찾아와 “당장 신탁 지지성명을 내라”고 윽박질렀다. 고당이 거부하자 흥분한 스티코프가 권총을 빼들었다. 고당은 옷자락을 헤쳐 보이며 “그래, 쏘아라”고 맞받았다. 그 기개에 질려 스티코프는 얼굴만 붉히고 말았다. 치샤코프 점령군 사령관까지 나서서 “신탁통치 결정서에 서명만 해 주면 조선의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고당은 고개를 저었다.(고당 조만식 회상록·고당기념사업회·1995년)
고당은 다음 해 1월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된다. 많은 우국지사가 찾아와 월남할 것을 권하지만 그는 “이북 동포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나 혼자만 월남할 수 없다”며 듣지 않는다. 고당의 최후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6·25전쟁 중이던 1950년 10월 18일 대동강변의 북한 내무성 정보처에서 북한군에게 피살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일성 세력은 고당을 연금하고, 살해했으나 조선민주당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副)당수였던 최용건(전 북한 부주석·1976년 사망)을 앞세워 조선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 만든다. 우당이란 허울만 정당일 뿐 조직도, 활동도 없는 일종의 관제(官製) 정당이다. 노동당 1당 지배체제인 북한이 “우리도 민주적인 다당제를 하고 있다”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어용정당이다. 북한은 1981년 1월 조선민주당을 ‘조선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한다. 서유럽 사회민주당들과의 유대 강화를 위한 고리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지난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민주노동당 김혜경 대표가 “당 대 당 정례 교류에 합의했다”는 당이 바로 조선사회민주당이다. ‘조선의 간디’로 불렸던 고당이 민주주의 기치 아래 창당했으나 김일성에 의해 조선노동당의 외곽 조직으로 변질돼 버린 바로 그 당이다. 김 대표는 “내년 초 민노당의 대규모 방북과 조선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서울 답방에 합의했다”면서 “통일로 가는 새 디딤돌을 놓았다”고 자평했다. 과연 지하의 고당도 그렇게 생각할까.
굴절된 조선사회민주당사(史)에는 고당의 핏빛 염원과 한(恨)이 서려 있다. 정당 간 교류를 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뿌리를 알아야 한다. 김 대표는 조선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방북했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평양 애국열사릉에 참배했으며, 방명록에는 “당신들의 애국의 마음을 길이길이 새기겠다”고 썼다. 그런 김 대표가 왜 고당의 애국 애족에 대해선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진보건 보수건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안에 존재하는 정당이라면 한국정당사의 큰 흐름 속에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념 이전의 문제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고당의 묘소가 마련돼 있다. 묘소라고 하나 그의 두발(頭髮)만 안장돼 있을 뿐이다. 고려호텔에 연금돼 있을 때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부인 전선애(田善愛·2000년 작고) 여사에게 건네준 두발이 45년 만인 1991년 이곳에 묻힌 것이다. 김 대표는 이제라도 고당 묘소에 참배하고 물어야 한다. 민노당 방식의 정당 교류는 누구를 위해서이며, 진정한 남북 화해 협력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되는지를.
언제까지 ‘민족끼리’ 혹은 ‘마주잡은 그쪽 손도 따뜻하더라’는 식의 ‘뜨거운 가슴’만 비벼 대고 있을 텐가. 민족에 취하고 통일에 취하는 건 이쯤으로 됐지만 그래도 취해야 한다면 제발 알고나 취하자. 반세기 전 고당이 울고 있을 듯하다.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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