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물 맞은 청계천에 가을이 내려앉았다. 막히고 덮였던 물길이 뚫리고 열렸으니 옛 이름 개천(開川)이 낯설지 않다. 흐르는 물은 세월과 같다. 청계천의 세월에는 망국(亡國)의 한(恨)과 가난한 나라 백성의 궁핍한 삶과 설움, 그리고 그것을 덮어야 했던 개발의 시대가 낡은 흑백필름처럼 이어져 있다. 이제 그 명암(明暗)의 세월을 뒤로하고 새 물이 흐른다.
흐름은 소통(疏通)이다. 청계천은 다시 흐르건만 우리 사회의 소통은 막혀 있다.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잘못은 통합을 얘기하면서 통합을 막은 이율배반에 있다. 노 대통령은 통합의 진정성을 호소하지만 그것은 이미 희화화(戱畵化)됐다. 여름내 나라를 시끄럽게 해 놓고는 뒤늦게 “대연정(大聯政)까지는 좀 과했죠?”라니. 발상의 전환을 강조한다고 한들 거기서 진정성의 무게를 느낄 수는 없다.
노 대통령은 ‘지도력의 위기’를 고민한다고 했다. “우리 정치에서 대통령이 얼마만큼 자기 정체성을 갖고 협상을 할 수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 얼마만큼 책임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기 정체성’ 찾기보다 시급한 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리더십으로의 전환이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정보화 사회에서 권력이 정보를 독점하고 제왕적(帝王的) 지도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을 묶어 내던 시대도 지났다. 갈수록 다양화 전문화되는 사회에서 정부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세금 값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국민이 세금 내며 위임한 국정을 ‘비용은 적게, 효율은 높게’ 운영하면서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이해 갈등을 조정하고 통합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절실히 요구되는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자기 정체성’은 그러한 리더십을 구현하는 데서 찾으면 된다. ‘이념의 집’에서 정체성을 찾으려 해서는 국민과의 소통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청계천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동안 한국사회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냈다. 비록 그 과정에 여러 모순이 중첩됐다고는 하나 그것은 역사의 바른 이행단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로서, 더욱이 분단의 조건에서, 이만한 성취를 이뤄낸 예를 찾기는 어렵다. 문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서로를 부정하는 ‘길항(拮抗)의 전선(戰線)’에서 대치한 채 한국인 모두가 이뤄낸 성취를 스스로 갉아먹고 있다는 점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근원은 바로 여기에 있다. 통합을 얘기하면서도 통합을 막은 노무현 정권의 이율배반은 특히 이 점에서 명백하다. ‘지도력의 위기’는 분열의 리더십에서 배태(胚胎)된 것이다.
한국사회는 또 하나의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산업화 엘리트들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와 탐욕으로 주도력을 상실했다. 민주화 엘리트들은 철 지난 이념과 도덕적 우월주의, 독선(獨善)에 매몰된 채 국정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갈 능력도, 미래의 비전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국민의 땀과 희생으로 이뤄낸 것이다.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의 실패를 국민(산업화 민주화 세력 모두)의 실패로 매도하거나 자학(自虐)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산업화, 민주화 이후의 단계를 밟아 나가면 된다. 이제 ‘노무현 이후’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하는 이유다.
막혔던 물이 다시 흐르듯 우리 사회도 단절에서 소통으로 흘러가야 한다. 선동과 대립을 넘어 치유(治癒)의 세상을 그려야 한다. 가을의 겸허함으로.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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