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헌법을 공부해 사법시험에 합격한 일을 두고 ‘유신판사’라고 부끄러워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국민이 대통령”이라고 선언했다. 두 달 전 국민과의 대화에서도 “국민은 제왕이고 대통령은 신하”라며 몸을 낮추었다. 신민적(臣民的) 국민관을 뒤집어놓은 표현이다.
그러나 유신 독재 권력의 대칭점에 서서 ‘참여’와 ‘분권’을 내세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행동’은 갈수록 ‘말’과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들이 매도하는 박 대통령의 일면을 점점 닮아 가는 느낌이다.
연정론(聯政論)에 대한 반대 여론이 70%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자 노 대통령은 “민심을 그대로 수용하고 추종만 하는 것이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조기숙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국민이 이성적으로 다 판단하는 것은 아니다”고 토를 달았다. ‘국민을 끌고 가겠다’는 식의 말은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바로 유신 시절 영도적 대통령제가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때 흔히 동원됐던 계도(啓導) 민주주의 논리와 닮았다. 여권의 한 의원조차 “코드도 이념도 안 맞는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하겠다는 발상이 마치 ‘대통령은 정당정치 위에 존재한다’는 선언처럼 들렸다”고 실토했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구속을 막기 위한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지휘권 행사에 대해 누리꾼들도 70%가 반대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율사 출신 의원들을 모아 놓고 “법의 집행이나 해석에 이견이 있으면 선출된 권력이 우위에 있다”고 정리했다. 이쯤 되면 참여정부의 ‘참여’ 주체가 누군지 혼란스럽다. 노 대통령은 누리꾼들을 향해 밤새워 편지 쓰고 이들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지만 결국 누리꾼들도 ‘정치 동원(動員)’의 대상이었을 뿐이라는 얘기다.
당정분리 원칙에도 불구하고 ‘수석 평당원’인 대통령의 한마디에 여당이 국가보안법 폐지, 연정론, ‘강정구 구하기’에 이르기까지 우르르 몰려다니는 현상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 직후 “국민 여론과 동떨어져 있다”고 고언(苦言)했던 여권 고위 관계자는 격노에 가까운 질책을 받고 ‘연정 전도사’가 됐다.
대통령이 정당정치와 법 위에 있다는 발상의 바탕에는 ‘정의(正義)에 대한 해석권이 나에게 있다’는 오만(傲慢)이 깔려 있다. 박 대통령의 경우는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가 그 명분이었다. 노 대통령과 여권 관계자들의 근거는 ‘개혁’의 당위성과 ‘선출된 권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은 참여정부의 ‘발명 특허품’이 아니다. 단군 이래 모든 권력이 내세웠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도 선출된 권력이었다. 더욱이 한국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채워 가고 발전시켜야 하는 미완의 명제다. 그래도 굳이 노 대통령과 측근들이 ‘내 방식대로 하겠다’면 차라리 이런 말을 듣고 싶다. “누가 뭐래도 경제에 전력투구하겠다.” 이것이 글로벌 경쟁시대에 ‘잘나가는’ 국가 지도자들의 ‘코드’이기 때문이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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