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장관은 1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1996년과 지금은 신념이 바뀌었다”며 지난 9년의 세월 동안 정치권력과 검찰 간의 관계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천 장관의 지휘권 발동에 대한 견해가 바뀌어 온 것은 그의 정치적 입지가 달라진 것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야당 초선 의원 시절=김영삼(金泳三) 정부 때인 1996년 4월 총선에서 당선돼 정치권에 입문한 천 장관은 법무부 장관의 구체적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권 발동을 규정한 검찰청법 8조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이 조항의 폐지를 포함한 검찰청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재야 변호사 출신으로서 야당인 국민회의의 초선 의원이었던 그에게 ‘지휘권 발동’ 조항은 정치권력이 검찰 수사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수단이라는 인식이 뚜렷했다. ▽‘여당 내의 야당’ 의원 시절=2001년 10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의 검찰청법 개정 입법청원을 소개할 당시 천 장관은 여당 의원이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당선됨에 따라 그가 속한 정당(1997년 국민회의, 2000년 민주당)이 여당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교동계나 민주당 구 주류 등 여권 내의 실세 그룹과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당시 참여연대가 이 입법청원을 한 것은 박상천(朴相千) 전 법무부 장관이 대전지검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법 위반 사건 수사를 위해 자민련 대전시 지부를 압수수색한 것을 질책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 계기가 됐다.
천 장관이 이 입법청원을 소개한 것은 정치적으로는 당시 여권 내의 구 주류에 맞선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 초기=천 장관은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3년 10월 6일 대검찰청 국정감사에서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 씨 사건에 대해 강금실(康錦實) 당시 법무부 장관이 “처벌할 수 있겠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등 수사에 관여하는 듯한 언행을 보인 데 대해 “부적절하다”고 비판했다.
나흘 뒤인 10일 법무부 국정감사에서도 천 장관은 노 대통령의 측근인 최도술(崔導術) 전 대통령총무비서관의 대선자금 수수 사건을 놓고 강 장관을 거칠게 몰아세웠다. 그러나 이번엔 이유가 달랐다.
그는 강 장관에게 “수사 대상이 대통령 측근이라는 점 때문에 검찰이 알아서 권력의 눈치를 볼 수도 있다”며 “검찰총장에게 지휘서신 같은 것을 보내서 중립적으로 수사하도록 독려할 용의가 없느냐”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막강한 검찰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해 권력의 검찰에 대한 ‘간섭 배제’와 ‘통제’라는 2가지 상반된 주장을 동시에 폈다. 당시 천 장관은 여권의 창업 공신이면서도 권력 핵심부와는 거리가 있는 애매한 입지에 서 있었다.
천 장관은 2002년 대선후보 경선 때 민주당 의원 중에서 유일하게 노 대통령을 지지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의 창업 공신 중 한 명으로 불렸지만 정권 초기에는 이른바 노 대통령의 ‘386 측근’ 그룹과 관계가 좋지 않았다.
2003년 10월 17일 천 장관은 386 핵심 참모인 이광재(李光宰) 당시 대통령국정상황실장을 겨냥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인물을 경질해야 한다. 전면 쇄신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이광재 퇴진’을 관철시킨 일도 있었다.
▽권력 핵심부에 진입=2005년 6월 천 장관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돼 현 정권의 핵심부에 진입했다. 그리고 10월 12일 동국대 강정구(姜禎求) 교수 사건에 대해 헌정사상 처음으로 불구속 수사하라는 지휘권을 발동했다.
권력의 검찰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제는 국민의 위임을 받은 권력의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천 장관이 이처럼 정치적 입지에 따라 견해를 바꿔 온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나 시국 사건에 대해선 불구속 수사를, 권력형 비리에 대해서는 단호한 처리를 주장하는 점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유지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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