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다. 고위급회담 중단 직후인 1992년 12월 자강도당비서로 쫓겨 간 것도 서울을 오가며 파악한 남한 실정을 김일성 부자에게 보고하면서 북한 사회의 제한적 개방을 건의했다가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998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강도를 방문했을 때는 “인민이 굶어죽고 있으니 대책을 세워 달라”고 말해 호위병이 권총을 꺼내 들었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김 위원장은 오히려 그의 충직함을 칭찬했다고 한다. 민주사회인 남에서조차 이처럼 대통령에게 목을 걸고 직언할 참모가 있을까 싶다.
▷자강도당비서 시절 그는 식량난이 심해지자 금지됐던 화전(火田)을 주민들에게 허용하기도 했다. 또 중소형 발전소 건설을 통해 전력난 극복에 앞장섬으로써 김 위원장에게서 직접 ‘경제 살리기’의 본보기라는 칭찬을 받았고, 이런 신임을 바탕으로 2003년 ‘넘버 3’의 자리인 국방위 부위원장에까지 올랐다.
▷동아일보는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의 주역인 남의 정원식, 북의 연형묵 총리를 ‘올해의 인물’로 공동 선정했다. 남북 화해의 새 장을 연 것으로 평가해서다. 이듬해 9월 평양에서 열린 8차 고위급회담 때 본보 편집국장이 기념패 전달을 위해 방북했으나 국가안전기획부(국가정보원의 전신)의 제지로 불발됐다. 그가 22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기념패’의 의미를 다시 새겨 본다.
이동관 논설위원 dk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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