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대립하는 쌍의 코드, 즉 이항대립(二項對立)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불변의 구조라는 것이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발상이다. 아기는 엄마(ㅁ)와 아빠(ㅂ)의 음운적 대립코드로부터 말을 익힌다. 직립으로 해방된 두 손은 움켜쥐기(점유)에서 주고받기(교환)로 발전한다. 거리에서 처음 접하게 될 ‘법 규범’은 피(위험)와 숲(안전)의 이항대립을 축약한 적록 신호등이다.
사회의 여러 장치 중 이항대립 방식으로 구성된 대표적인 것이 ‘법’ 시스템이다. 거기에는 권리와 의무, 주체와 객체, 요건과 효과, 규범과 사실, 실체와 절차 등 무수한 이항대립 쌍이 자리 잡고 있다. 합법과 불법의 이항대립 코드로 촘촘히 짜인 법망은 인간 사회의 분쟁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준다. 마치 넓적한 홍어가 앞과 옆으로 몸을 뒤집어 교묘히 작살을 피하듯이.
하지만 우리는 ‘법의 지배’가 보장하는 안정과 신뢰의 유토피아를 누리면서도 ‘법률가 지배’가 초래할 부작용에 대해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률가들은 대개 개별사건의 해결에 치중하기 때문에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전체적인 맥락을 간과하기가 쉽다. 법률가들은 주로 현재나 과거의 문제를 취급하기 때문에 미래의 과제를 조망하고 계획하는 일에는 그다지 능숙하지 못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 정치가 ‘법률가 지배’의 함정에 빠져들고 있다는 불안감은 필자만의 기우일까.
정치개혁은 ‘지역구도 해소’와 ‘선거제도 변경’이라는 협소한 시야에 갇혀 정당법 정치자금법은 물론 헌법과의 정합성조차 외면하고 있다. 현행 정당법 정치자금법하에서 중·대선거구제는 지역정당 추가 창당이나 무소속 출마를 유인할 뿐 정책중심 다당제의 형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헌법이 정한 대통령제하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채택한다는 것도 유례를 찾기 힘든 무모한 정치실험이다. 원래 그것은 의원선거가 곧 행정부 선택을 의미하는 의원내각제에서 대표성을 좀 더 정교하게 반영하려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일부 ‘진보적이라고 하는’ 법조인들의 사법개혁 추진 방안들 가운데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도입이야말로 ‘법률가 지배’의 실패 사례를 극명하게 보여 준다. 총정원을 1200명 수준으로 통제해 전국에 8∼10개의 법학전문대학원을 인가한다는 것이다. 법령안이 제시한 설치기준에 따르면 미국 로스쿨의 93.4%, 일본 법학전문대학원의 69%가 탈락한다는 황당한 결론이 나온다. 이처럼 시장경쟁을 원천 배제하는 ‘공급 담합’의 ‘관제 특혜분양’ 방식으로 곧 닥칠 법률시장 개방의 미래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법률가 지배’의 미시적 근시안적 정책실패보다 해로운 것은 이항대립 ‘코드’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행태다. 예리한 법도(法刀)로써 옮고 그름을 갈라 다른 쪽을 ‘불법 지옥’에 폐기하는 통치방식이야말로 최악의 ‘법률가 지배’가 아닐 수 없다. 원래 법학을 공부한 레비스트로스가 정치논의를 자제했던 이유는 문화의 ‘코드’가 정치화될 때의 위험을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역작 신화학 제1권이 오케스트라의 악장 형식을 차용한 데는 ‘화음(chord)=조화’의 의미를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신우철 영남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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