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정진석(鄭晋錫·66·사진) 명예교수는 최근 광복 직후부터 6·25전쟁 직전까지의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등 4대 신문의 영인본을 펴냈다. 올 2월부터 10개월간 각 신문사가 소장한 신문 제본이나 마이크로필름을 뒤져 가며 묶어낸 결과물로, A3용지 크기 1만3200쪽 17권 분량이다.
한국언론사 전문 연구자인 그는 독립신문 한성순보 대한매일신보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 일제하 신문의 영인본을 직접 만들거나 영인본 제작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주변에선 그에게 ‘영인 교수’라는 별명도 붙여줬다.
“이 시대 연구를 해 보면 닥치는 일이지만 4·19혁명 이전의 신문자료를 구한다는 것이 개인 연구자에겐 무척 어렵습니다. 때문에 1차 사료인 신문을 놔두고 2차 사료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죠. 저는 영인본 발간을 ‘자료의 민주화’라고 부릅니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거죠.”
당시 신문들은 현재로선 쉽게 실감을 얻기 어려운 당대 정치사회의 지형도를 파악하게 한다. 6·25전쟁 발발 직전 정부가 얼마나 안이했는가를 보여 주는 기사도 적지 않다. 신문들은 소련이 북한에 남침을 강요하고 있다거나 인민군이 전투세력을 구비하고 있다는 기사를 종종 게재했지만 남한 정부는 “세력 과시를 위한 장난”으로 평가 절하했다는 것.
지금도 논란이 되는 몇 가지 사실도 있다.
서울신문 1946년 6월 5일자는 미 군정이 지리역사교과서를 만들면서 ‘Sea of Japan’을 그대로 일본해로 번역하자 ‘동해냐 일본해냐’를 지적하는 글을 실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취임한 직후 일본으로부터의 대마도 반환은 물론이고 일제가 탈취해 간 문화재 반환을 요구하겠다는 AP통신과의 인터뷰 기사도 영인본에 수록됐다.
“최근 과거사를 규명하겠다는 작업이 한창이지만 이번 영인본처럼 1차 사료를 제대로 활용했으면 합니다. 광복 이후나 일제강점기를 규명하면서 편향된 자료를 보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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