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인혁당 사건=1964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는 대규모 지하정당’으로 규정한 인혁당이 사실은 혁신정당 활동을 하던 청년들의 서클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남파간첩 김영춘이 인혁당 창당을 주도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 내부 문건에 따르면 김영춘은 대북 정보기관에 의해 북한에 파견된 간첩이었다.
과거사위는 또 중앙정보부가 당시 이 사건의 주요 배경이 됐던 한일 국교정상화 추진 반대 시위와 인혁당의 연계성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증거도 갖고 있지 못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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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학련 사건=과거사위에 따르면 1974년 당시 민청학련이 전국적인 연합시위를 하기 위한 연락망을 갖고 있었으나 단일한 명칭과 강령, 규약을 가진 정치적 결사체는 아니었다.
과거사위는 또 수사도 하지 않은 시점에서 박 대통령이 담화문을 통해 민청학련을 ‘공산주의자와 결탁해 인민혁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규정한 점도 사건 조작과 왜곡의 근거로 든다. 중앙정보부가 박 대통령의 지침에 따라 끼워 맞추기식 수사를 벌였다는 것이다.
과거사위는 또 민청학련이란 명칭도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황인성(黃寅成) 현 대통령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유인물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1974년 당시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을 배후에서 조종한 주동자로 인혁당 조직원 여정남을 꼽았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여정남이 민청학련 학생들과 교류를 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배후 조종을 한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는 또 1975년 4월 인혁당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 집행이 박 대통령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근거로 △이례적으로 오전 4시 55분에 사형이 집행된 점 △대통령 외에는 당시 사형 집행 권한을 갖고 있던 국방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을 움직일 수 없는 점 △박 대통령이 1975년 2월 문화공보부 연두순시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들에게 극형을 내리지 않은 것을 질타한 점 등을 들었다.
▽과거사위 조사 문제없나=이번 조사는 국정원과 검찰, 국방부 등에 보관된 자료 위주로 이뤄졌다. 과거사위는 “국정원 보존 문서 중 핵심 자료는 거의 없었다”고 밝혔다. 또 사건 피해자를 제외한 면담 조사자는 30명에 그쳤다. 특히 각 사건 수사에 관여했던 전직 중앙정보부 직원 8명은 모두 과거사위의 면담 조사에서 사건 조작이나 고문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7일 과거사위의 조사 결과 발표 기자회견에서도 조사의 객관성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사위 측은 “관련자 증언은 착각이나 정치적 입장 변화에 따라 부정확해지거나 왜곡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박형준 기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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