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대통령 “許청장 문책할 법적권한 없다”…책임 미루기

  • 입력 2005년 12월 28일 03시 01분


고개 숙인 치안총수지난달 15일 시위 중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농민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고개 숙인 치안총수
지난달 15일 시위 중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농민이 숨진 사건과 관련해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고개 숙여 사과하고 있다. 원대연 기자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7일 시위농민 사망사건에 대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에서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허준영(許准榮) 경찰청장의 문책인사에 관해서는 “권한이 없다”며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연 노 대통령의 의중이 무엇인지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대통령의 속내가 뭐냐”=노 대통령은 이날 “지금 제도상 대통령이 경찰청장에 대한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법적 근거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경찰청장의 임기제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노 대통령은 이어 “다음 나머지는 정치적 문제이며, 대통령이 권한을 갖고 있지 않으면 본인이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는 어찌 보면 임기제 경찰청장을 중간에 경질할 법적 권한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허 청장의 유임 쪽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문제’나 ‘본인의 판단’이란 용어를 쓴 점에 비춰볼 때 허 청장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해 김만수(金晩洙)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의 발언 그대로 이해해 달라”고만 말했다. 허 청장에 대한 노 대통령의 호·불호 의사를 내비칠 경우 어떤 형태로든 시위농민 사건에 청와대가 휩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의식한 듯했다.

노 대통령이 이날 “본인(허 청장)이 어떤 판단을 했을 때 대통령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하는 것은 이미 본인의 판단이 아니고 대통령의 판단을 말하는 셈이다”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노 대통령의 메시지가 허 청장의 유임 쪽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고 해석하는 분위기다. 허 청장 본인이 사퇴설을 일축했기 때문에 청와대가 재론하기 어려워졌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엔 “허 청장 경질 이후가 만만치 않다”는 고민도 깔려 있다. 당장 검경수사권 조정 문제 등 산적한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선 치안총수 낙마가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와대 외부에서는 노 대통령의 발언을 “허 청장이 알아서 물러나라”는 쪽으로 해석하는 게 우세하다. 임기제라는 제도상 대통령이 나서서 문책할 수는 없지만 “문책하지 않겠다”고 재신임 의사를 밝힌 건 아니라는 얘기다.

대통령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는 “강제로 그만두라고 하지는 못하지만 당연히 본인더러 그만두라는 얘기 아니냐”고 해석했다.

앞으로의 여론 추이도 허 청장 인책의 변수가 될 전망이다.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에도 불구하고 허 청장에 대한 비난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을 경우 허 청장의 자진 사퇴론은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본인이 판단할 문제”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상황까지를 감안해 알아서 하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왜 대국민 사과에 나섰나=노 대통령이 직접 대국민 사과에 나선 결정적 계기는 물론 국가인권위원회의 26일 농민 사인(死因) 발표다.

인권위가 경찰의 과잉 진압을 지적한 이상 국가통수권자로서 가만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사과를 통해 파문을 수습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농민 사망에 대한 비난이 청와대를 겨냥하자 이를 조기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고 보기도 한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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