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서기관이 국회 사무처에 9급 속기사로 들어온 1972년은 어쩌면 국회의 위상이 가장 추락한 해였다. 유신 선포로 국회가 해산됐기 때문. 최 서기관은 “국회가 해산된 줄도 모르고 출근했다가 국회 간판이 떼어지는 것을 보고 동료 속기사들과 발을 동동 굴렀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헌법에 총회기일수 규정이 있던 1987년까지 국회는 1년에 100여 일 외에는 스스로 회의를 열고자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국회가 1년 내내 열리다시피 하면서 속기과 직원들이 여름휴가 일정을 잡기가 곤란한 지경이 됐다.
단순히 회기일수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속기 업무가 필요한 각종 상임위원회와 특별위원회 회의도 엄청나게 많아졌다. 최 서기관은 “속기사 수는 그대로인데 업무는 폭증해 격무에 시달리고 있다”고 했다. 국회에는 속기사가 100명 정도 있으며 과거에는 남성이 대부분이었으나 이제는 성비(性比)가 역전됐다. 속기사 업무는 극도로 긴장해야 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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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도입도 국회의 위상을 올렸다는 게 최 서기관의 평가. 첫 청문회에 증인으로 참석한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증언을 받아 적으면서는 ‘내가 바로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고 한다.
최 서기관은 “국회 위상이 올라가면서 안으로도 성숙해졌다”고 말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에는 여당이 본회의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법안을 날치기하기 직전 속기사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는 일도 있었다. 이제 법안 처리는 국회 본회의장에서만 할 수 있다.
법안의 변칙 처리가 줄어들면서 속기사들의 근무 환경도 ‘안전’해졌다고 한다. 태평로 시절에는 본회의장에서 흡연이 가능해 의석마다 유리 재떨이가 있었고 무거운 나무 명패도 고정식이 아니어서 유사시에 이런 물건들이 날아다니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미가 있던 옛날과 달리 “다른 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밖에서도 잘 어울리지 않는 걸 보면서 서운한 마음이 든다”고 아쉬워했다.
최 서기관은 33년 동안 속기 업무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지난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를 들었다.
“후배 속기사들이 가져온 원고를 최종 인쇄 직전에 몇 번씩 검토하며 읽는데 등에서는 비지땀이 줄줄 흐르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습니다. 두고두고 역사에 남을 기록이다,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는 마지막으로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서 한번 한 발언은 절대 속기록에서 삭제되지 않는다며 의원들에게 말을 천금(千金)같이 해 줄 것을 당부했다.
“‘방금 한 말을 속기록에서 삭제해 달라’는 요청을 하고 ‘속기록 삭제에 합의했다’는 말씀도 하는데 국회법에 따라 그런 발언까지 다 속기록에 남습니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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