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한국 외교 ‘작업의 정석’ 아는지

  • 입력 2006년 1월 5일 03시 05분


청춘 남녀의 연애 방식을 다룬 영화 ‘작업의 정석’이 개봉 열흘 만에 관객 18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관객들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는 ‘작업’의 구체적 노하우를 벤치마킹하려는 심리도 작동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길거리에서건 강의실에서건 작업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작업의 성패가 자기 객관화에 달려 있다는 것쯤은. 자신의 인물 매너 능력도 파악하지 못한 채 ‘오르지 못할 산’에 매달린다면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작업의 정석’은 국가 간의 마음 얻기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하지만 2006년 신년 미국 워싱턴에서 바라본 한국의 객관적 좌표 찾기는 좀 미흡해 보인다. 일단 경제 규모 11위라는, 내심 뿌듯한 통계가 착시 현상을 부르는 것 같아 아쉽다. 세계 11등이라는데…. 그러나 국력과 국격(國格)은 경제 덩치 외에도 삶의 질, 법의 지배, 갈등 해소의 세련됨, 신뢰와 정직이라는 수치화가 불가능한 요소를 아우르는 것이다.

우리의 가슴은 부풀어 있었던 것 같다. 슬그머니 없던 일이 돼 버렸지만 ‘동북아 균형자론’이 튀어나왔고, 수평적 한미관계가 주창됐다. 뒷감당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만큼 뿌듯한 말이 더 있을까.

지난해 4월 미 국무부 정책기획실장은 워싱턴을 방문한 한국 외교관에게 “외교정책은 국력에 걸맞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주변국에 짓밟혔던 폴란드를 거론하면서 나온 이야기라지만, 폴란드 들으라고 한 소리로 착각할 사람은 없었다.

우연치고는 좀 묘했다. 꽤 존경받는 현직 외교관은 2년 전 기자에게 “내가 유럽사를 좀 알지만, 아무리 봐도 한국은 동아시아의 폴란드”라고 했다.

폴란드가 어떤 나라인가. 피아니스트 쇼팽, 과학자 퀴리 부인을 배출하면서 국민적 자부심으로 치자면 어느 나라 못지않은 곳이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시대에 폴란드의 사위(四圍)는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로 채워져 있었다.

기자는 한때 한국이 동북아시아가 아닌 말레이 반도나 중남미의 한 귀퉁이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상상한 적이 있다. 지난 세기, 폴란드의 어느 청년도 비슷한 꿈을 꿨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일 수교 협상 때 어느 일본 정치인이 했다는 말처럼 한국이 이사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자기 역량의 범위 안에서 지혜롭게 실리적으로 외교하는 것 말고는 해법이 없지 않을까?

우연히 발견한 ‘포커의 정석’이란 책에서도 비슷한 교훈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책의 제1장을 압축하면 이렇다.

“하수(下手)의 포커는 내 카드의 액면만 따진다. 상대방의 패가 얼마나 센지는 관심이 없다. 결과는 뻔하다. 중급에 이르면 시야가 조금 넓어지면서 상대의 패도 요모조모 따진다. 그러나 승리는 장담 못 한다. 진짜 고수는….”

한국과 폴란드는 포커 게임을 어떻게 한 걸까. 11대 경제대국과 문화적 자부심만 믿고 ‘내 패가 충분히 좋다’며 다른 도박사의 패 읽기를 외면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불필요한 자기 비하는 건강하지 않고, 실리에 맞지도 않는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부작용을 낳았지만, 60년 만에 이뤄 낸 경제 성장과 민주주의는 어디 내놓더라도 손색이 없는 우리의 큰 성취다.

이젠 균형 잡힌 자기 객관화의 ‘정석’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인도의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는 1946년 쓴 ‘인도의 발견’이라는 책에서 이런 취지의 말을 남겼다.

“내 피 속에는 인도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인도의 뒤처짐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싫다. 조국을 끝없이 사랑하면서도 마치 이방인처럼 비판적인 안목을 잃지 않겠다.”

네루가 말한 비판적 안목 역시 출발점은 자기 객관화였을 것이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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