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학생에서 ‘노빠 대표’로=유 의원은 경북 경주 출신으로 1978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을 했다. 1984년 서울대 복학생협의회장 당시 한 시민을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오인해 불법 감금 폭행한 이른바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된 뒤 형을 살기도 했다. 이때 감옥에서 쓴 ‘항소이유서’가 운동권 필독서처럼 읽히며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88∼91년 이해찬(李海瓚) 당시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지냈고, 독일로 가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뒤에는 칼럼니스트, TV 시사토론 진행자, 시사평론가로 활약하며 거침없는 논지와 뛰어난 말, 글 솜씨로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다.
노 대통령과는 2002년 대선 당시 자문 역할을 하며 본격적인 인연을 쌓았다. 유 의원은 당시 개혁국민정당 대표집행위원으로 당은 달랐지만 노 후보의 지지율이 급락했을 때 ‘국민후보 노무현 지키기’를 외치며 적극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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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밤 소속 정당인 민주당보다 유 의원이 참여하고 있는 개혁당을 먼저 찾아 샴페인을 터뜨린 것은 유명한 얘기. ‘노빠 주식회사 대표’라는 평가를 듣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유 의원은 2003년 3월 국회의원 재·보선 당시 경기 고양 덕양갑에서 여당이 후보를 내지 않은 상태에서 개혁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개혁당이 해산하자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열린우리당에서 유 의원은 ‘대통령 지킴이’ 역할을 자처했다. 지난해 10·26 국회의원 재선거 참패 이후 당내에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비등하자 “대통령이 여당 안에서 탄핵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계속된 돌출 언행=‘국회의원 유시민’은 돌출 발언과 행동으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등원 첫날부터 면바지에 노타이 차림으로 나와 의원선서를 하려다 다른 의원들의 반발로 선서를 하지 못하는 해프닝이 빚어졌다. 2004년 17대 총선 직전에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얻는 표는 죽은 표”라는 발언으로 민노당 지지자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유 의원은 같은 당 의원들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아 ‘분파주의자다’, ‘싸가지가 없다’는 등의 빈축을 샀다. 17대 총선 전에는 당시 정동영(鄭東泳) 의장이 주도한 공천에 대해 “보수적 인사들을 무차별 영입해 당이 잡탕이 됐다”고 몰아붙였고, 2004년 말 국회 파행 당시 협상론을 주장하던 정장선(鄭長善) 의원에게는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나라당이 반대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가치 있다”, “한나라당과 대화하는 것보다 항공기 납치범을 다루는 게 더 쉽다”고 했다가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자 “이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인 것”이라고 찬성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언행도 많았다.
이라크 파병에 대해서도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바꿔 진보 진영의 비판을 샀다.
장강명 기자 tesomi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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