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대해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지, 한국과 일본의 여론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의 여론이 북한을 보는 시선은 따뜻하다. 남북통일의 비원(悲願)을 배경으로 남북교류가 진전될 때 여론은 많은 지지를 보내 왔다. 정부 정책보다 여론 쪽의 온도가 높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반대로 일본의 여론이 북한을 보는 시선은 싸늘하다.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따른 군사적 위협, 일본인 납치와 그 뒤 북한이 보여 준 성의 없는 대응은 대북 불신감을 전례 없이 고조시키고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북한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려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정권보다 여론 쪽이 더 깊은 불신감을 갖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두 나라가 여론을 중시하는 정책을 선택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먼저 한국을 보자. 남북교류가 계속 심화된다고는 하지만 북한이 한국에 주는 군사적 위협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사실상 묵인한 채 남북교류를 촉진하는 것은 북한의 핵 보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일 뿐 아니라 미국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 간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일이다.
만약 일본 정부가 여론을 추종해 대북정책을 짠다면 납치 피해자 문제에 대한 북한의 성의 있는 대응을 요구하기 위해 경제제재를 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이 제재에 협력할 가능성이 적다. 경제 거래 규모를 볼 때 일본만의 단독 경제제재가 북한의 양보를 이끌어 낼 가능성은 희박하다. 결과적으로 북한에 경제제재를 가하는 일본 정부와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한국 중국 정부의 거리는 지금보다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현재 한국도 일본도 이 같은 정책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남북 대화를 추진하는 노무현(盧武鉉) 정권도 북한의 핵무장을 승인하지 않았고, 납치 피해자 구제를 중시하는 고이즈미 정권도 경제제재에 나서지는 않았다. 어느 쪽의 정책도 장래 외교정책의 선택 폭을 좁히고 말 것이라는 점에서 결코 합리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히 따른다면 이 같은 합리성을 내세우는 것은 용인될 수 없다. 현명하지 않은 외교정책도 여론이 요구한다면 무시할 수는 없다.
더 귀찮은 문제는 여론에 영합하는 외교정책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여론의 지지를 얻는 수단으로 정치 지도자가 외교문제를 이용할 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다. 또 정부가 준비하는 외교정책과 여론이 요구하는 외교정책 사이에 거리가 있을 경우 그 거리를 이용해 여론의 입맛에 맞게 지도자의 정책을 비판하는 정치가가 등장할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
한국을 보자면 노 대통령 스스로가 인기를 끄는 수단으로 외교를 이용한 흔적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내정(內政) 지향인 고이즈미 총리를 봐도 2004년 두 번째 북한 방문이 그 직후에 있었던 참의원 선거와 무관하게 이뤄졌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가 납치 피해자를 도외시하고 북-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면 자민당, 더구나 총리 자신이 속한 모리(森)파의 반발을 피할 수 없다. 정책 지향이 반대라고는 하지만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정치가는 여론과 외교의 관계에 민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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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체제에서 여론의 역할을 부정하는 일은 자살 행위다. 그러나 무작정 여론의 요구에 따르는 것은 불합리한 정책을 추진하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어떡하면 좋을까. 이 딜레마의 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후지와라 기이치 도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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