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던 사인방(四人幇)의 마지막 생존자 야오원위안(姚文元)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중국의 한 지인이 한 말이다.
관영 신화통신은 “린뱌오(林彪), 장칭(江靑)과 함께 반혁명집단 사건을 주도한 야오원위안이 당뇨병으로 2005년 12월 13일 74세로 사망했다”고 전했다. 공산당 간부가 숨졌을 때 으레 따르는 약력조차 없는 단 두 줄짜리 기사였다.
지인의 말은 시퍼런 권력을 휘둘렀던 야오에 대한 초라한 사망 보도를 지적한 것이 아니었다. 이른바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지 만 40주년의 연대기적 상징성을 갖는 해에 비로소 문혁의 인적 청산이 끝났음을 상기시킨 것이었다.
게다가 야오가 1965년 11월 10일 상하이 원후이(文匯)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함’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문혁의 불길을 지핀 뒤 역시 40년 만에 숨진 게 공교롭다는 얘기였다.
당시 문화대혁명은 ‘문혁의 붓’으로 일컬어졌던 야오에 의해 만민 평등과 계급 타파를 지향한 인류 역사상 위대한 실험으로 찬양받았으나 중국인들에게는 전례 없는 재앙과 불신, 혁명에 대한 회의를 불렀다.
류사오치(劉少奇) 덩샤오핑(鄧小平) 펑전(彭眞) 뤄루이칭(羅瑞卿) 양상쿤(楊尙昆) 등 건국 원로들이 반당 분자로 몰려 혹심한 박해를 받았다.
특히 1950년대 말 4300만 명이 굶어죽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대약진운동에 이어 11년간 계속된 문혁은 중국 건국의 기초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1976년 문혁이 끝난 뒤 중국 경제는 30년 이상 후퇴하는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마오의 사망으로 정권 탈환에 성공한 덩이 1979년 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 노선을 천명한 것은 마오의 극좌 노선에 대한 반기였다. 덩은 이듬해 광둥(廣東) 성 선전(深(수,천)) 주하이(珠海) 산터우(汕頭)와 푸젠(福建) 성 샤먼(廈門)에 중국 최초의 경제특구를 건설해 자본주의 실험에 나섰다.
야오의 붓끝이 중국을 광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965년 북한의 상황도 비슷했다. 이 해 9월 30일자 노동신문은 ‘당 창건 20주년을 맞으며: 조선혁명과 우리 당의 주체사상’이라는 글을 실어 김일성(金日成) 주석을 우상화하는 주체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67년 10월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공화국 정부의 10대 정강’을 발표해 주체사상이 국가의 최고 지도이념이라고 천명했다.
문혁이나 주체사상 모두 권력투쟁의 산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산혁명에 대한 초기 이상주의와 열정이 담겨 있었던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정통 사회주의 노선을 부정한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대한 반감도 있었다.
그러나 출발은 같았지만 중국과 북한은 10여 년 만에 전혀 다른 발전의 길을 걸었다.
중국은 유례없는 대혼란을 겪었지만 ‘행운’이 뒤따랐다. 문혁 때 모진 박해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마오의 유산과 철저히 단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북한은 김 주석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부자 세습으로 과거의 유산을 안고 살아야 했다. 정권 유지를 위해 주체사상의 고삐를 더욱 틀어쥐어야 했다.
김 위원장이 중국을 극비 방문해 남부의 개혁개방 현장을 시찰했다. 당비서 시절이던 1983년 선전에 들렀을 때 중국의 경제특구 실험을 ‘타락한 사회주의’ ‘또 다른 수정주의’라며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냈던 그였다. 이번 방문에서 그의 생각이 달라졌을까? 김 위원장이 주체사상을 어떤 식으로 극복해 북한식 개혁개방을 이끌어 낼지 궁금하다.
황유성 베이징 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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