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SC 문건 유출…“李대론 안돼” 외교부 탈레반 반기

  • 입력 2006년 2월 24일 03시 06분


정부와 정권 실세 및 공무원들의 총체적 보안의식 실종을 드러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문건 유출 사건’의 밑바탕에는 외교안보 정책을 둘러싼 노선과 주도권 다툼이 깔려 있다. 그러나 22일 청와대가 발표한 조사 결과는 이 같은 내부 대립과 모순을 밝혀내기보다는 오히려 미봉하려 한 흔적이 짙다.

▽노선 대결=기밀 문건을 열린우리당 최재천(崔載千) 의원에게 유출한 이종헌(李鍾憲) 대통령의 전비서관실 행정관은 외교통상부에서 파견돼 근무하다 지난해 9월 옷을 벗고 삼성전자로 옮긴 권모 씨, 해외공관에 근무 중인 김모 외무관과 함께 외교부 안팎에서 ‘탈레반 3인방’으로 불려 왔다.

외교부에서 ‘잘나가지 못했던’ 이들은 평소 대미 외교에서 ‘자주(自主)’를 강조하는 성향이었고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들어선 뒤 코드가 맞아떨어지면서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에게 몇몇 상급자와 사무관급이 합세했다.

이 중 일부가 청와대에 파견돼 청와대 내 386 인사들과 의기투합하면서 한미동맹을 중시하는 외교부 내 ‘동맹파’를 강력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자주파는 동맹파가 주도한 용산기지 이전과 한미동맹 재조정 협상, 이라크 파병 등을 국익을 뒤로한 친미 외교라고 공격했다. 반면 동맹파는 대미 외교 경험이 없는 이들의 현실성 부족을 꼬집었다.

자주파와 동맹파의 첨예한 갈등은 2003년 말 외교부 북미3과 직원의 대통령 비판 발언이 폭로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당시 윤영관(尹永寬) 외교부 장관은 “양쪽 모두 정리하자”고 했으나 청와대에서 자주파의 정리에 반대하면서 윤 장관이 옷을 벗게 된 것. 당시 NSC 사무차장이던 이종석(李鍾奭) 통일부 장관도 윤 장관 낙마에 일정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워게임=외교부 안팎에는 이들이 자주니 동맹이니 하는 철학과 원칙 때문이 아니라 외교안보 정책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파워게임을 했다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이 장관은 노무현 정부 초 자주파와 동맹파의 격돌 때 자주파의 손을 들어 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이 장관이 실세로 부상함에 따라 이번에는 자주파와 갈등을 빚었다. 자주파는 이 장관을 향해 ‘기회주의자’ ‘위장한 숭미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특히 2004년 8월 통상전문가로서 외교안보 정책 경험이 별로 없는 정우성(丁宇聲) 현 유럽연합(EU) 대사가 대통령외교보좌관에 기용되자 자주파는 이 장관이 외교안보 정책을 독점하려는 것으로 판단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최 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魯會燦) 의원도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장관이 주도한 대미외교를 비판했다. 이들 자주파는 청와대의 386, 특히 국정상황실과 민정수석비서관실에 근무하는 386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동조세력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여러 외교안보 문건이 흘러나와 이 장관을 비롯한 당국자들이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은 이즈음부터였다. 노 의원이 공개한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 관련 문건도 삼성전자로 옮긴 권 씨가 대통령국정상황실에 근무할 당시 작성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일부 강경 자주파 성향의 직원들은 전략적 유연성 협상 내용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노 대통령에게 혈서(血書)를 보내려 했다는 얘기도 있다.

결국 노 대통령까지 나서서 파워게임을 벌이는 공무원의 행태를 비판하게 됐고 이에 따라 권 씨가 옷을 벗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노 대통령이 이 장관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올해 초 ‘이종석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 내정’이 발표되자 그를 겨냥한 외교안보 문서들이 잇따라 공개된 배경에 대해 자주파의 반격이라는 해석이 제기되는 것은 이 같은 저간의 사정 때문이다.

▽그래도 남는 의혹=청와대가 이 행정관에 대한 징계를 외교부에 요청함으로써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또 유출된 문건과 폭로자가 한둘이 아닌 만큼 외교안보 핵심에서 뭔가 ‘조직적인 플레이’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청와대가 유출 경위를 확인한 문건은 최 의원이 1일 공개한 ‘NSC 상임위 회의자료’ 1건뿐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나머지 문건의 유출 경위도 조사하고는 있지만 비밀 분류가 안 돼 있고 다양한 경로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조사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정치권에서는 청와대가 문건 유출 조사를 계속해 자칫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모험을 감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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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 유출자 실명보도에 엉뚱한 유감 표명▼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 회의록의 유출자가 가려진 뒤 본보 등이 유출자를 실명으로 보도하자 청와대가 23일 유감을 표명했다.

22일 유출 경위 조사결과를 설명하면서 청와대가 유출자인 이종헌 대통령의전비서실 행정관 등을 실명으로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도 이를 실명으로 보도했다는 이유에서다.

청와대가 내부인이 관계된 ‘비위(非違)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이번처럼 당사자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이례적이다. 특히 비위의 내용이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문제일 경우에는 그런 부탁 자체가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보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유출자 공개 여부를 놓고 논의한 끝에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중대한 내용인 만큼 개인의 사생활 보호보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공익이 우선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본보는 더구나 유출 당사자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청와대의 발표 내용을 확인한 만큼 ‘공인(公人)’이 관련된 ‘공적 관심사’에 대한 실명 보도는 당연한 것으로 판단했다.

법원도 공인의 공적 관심사에 관한 문제의 경우 당사자를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청와대 행정관이면 공인으로 봐야 하고 사건도 국가안위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인 만큼 실명 보도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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