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 되면 온 국민은 정치평론가가 된다. 저마다 잠재적 대권주자들을 A+B, B+C, C+D… 식으로 묶어 보면서 판세 읽기에 바빠진다. 예를 들면 ‘○○○와 ○○○가 연대하면 어떨까’ 하고 머릿속에 그려 보는 것이다. 두 사람은 영호남 출신에 근대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적자(嫡子) 격이니 손만 잡으면 이보다 좋은 카드가 없어 보인다. 그럼 ○○○와 ○○○은? 지역과 이념에, 경륜까지 합쳐지니 더 확실한 카드가 아닐까. 대충 이런 식이다.
수학적으로 고건 김근태 박근혜 손학규 이명박 이해찬 정동영 정몽준(가나다순) 8명을 놓고 2명씩 짝짓기를 하면 20개가 넘는 조합이 나온다. 2, 3명씩 짝짓기를 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어떤 한 조합이 대권을 잡게 될지, 아니면 한 사람이 끝까지 홀로 가서 뜻을 이룰지, 아니면 전혀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지, 누구에게든 관전의 핵심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이홍구 전 총리는 지난달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가 뽑은 역대 대통령은 예외 없이 소수(파)의 대통령이었다”면서 “오직 연립과 합작, 그리고 타협을 통해서만이 국가를 운영할 수 있고, 국민 분열을 예방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대로 역시 연대해야 대권을 잡는 것일까.
‘연대의 정치’를 부정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정치가 민주 대 반민주, 우파 대 좌파의 경직된 대립 구조에서 벗어나 실사구시(實事求是)형으로 바뀌고 있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연대가 활발하면 정국은 소란스럽겠지만 대결 구도에서 나타나는 극단의 증오와 적대감은 줄어든다. 연대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누구든 서로를 미워할 필요가 없다. 싫으면 갈라서고 좋으면 합치면 된다. 정치의 탈(脫)이념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짝짓기 열풍은 가슴에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무엇보다 설명이 부족하다. 왜 열린우리당이 고 전 총리와 연대하려고 하는지, 왜 한나라당이 민주당과 손을 잡자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참여정부 초대 총리를 지낸 고 씨가 우리의 이념과 정책을 잘 이해해서”라고 하지만 군색하기 짝이 없는 설명이다.
고 전 총리는 참여정부의 주주(株主)가 아니었다. 피고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이제 와서 “한때나마 동지였다”고 한다면 누가 고개를 끄덕이겠는가. 더욱이 고 전 총리는 누가 뭐래도 우리 사회의 주류(主流)다. 지난 3년 동안 ‘주류’를 ‘득세한 기회주의자들’로 규정하고 뒤엎기에 혈안이 되더니 이제 와서 주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격이다.
민주당에 대한 한나라당의 구애(求愛)도 마찬가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은퇴함으로써 제휴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쌓이고 쌓인 앙금이 당장 해소될 정도는 피차 아니다. 결국 ‘생존’이 목적이다. 여야 구별 없이 ‘대권을 잡으면 좋고, 못 잡더라도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라는 절박감이 정체성 불문, 이념 불문의 연대 경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여권(與圈)이 더 절박해 보인다. 오죽하면 당 행사인 의장 경선에서 유력 후보들이 고 전 총리와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영입을 공약으로 내걸었을까. 한국 정당사에 없던 일이다. 최근에도 당 인재발굴기획단장인 문희상 의원이 강 씨를 만나 “잔 다르크가 돼 달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점입가경이다.
절박함은 두려움에서 나온다. 너무 오만했기에, 너무 함부로 파헤쳤기에, 정권을 놓치고 난 이후가 두려운 것이다. 역사가 바뀌고, 주객(主客)이 바뀌고, 공수(攻守)가 바뀔 것이라는 두려움이 여당을 거의 필사적으로 연대에 매달리게 하는 것이다. 노란 목도리를 매고 한강을 건너올 때의 그 기개와 열정은 다 어디로 갔기에 이 모양일까.
이재호 수석논설위원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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