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그동안의 북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다. 별도의 위폐 협의체를 구성하자는 것은 위폐와 6자회담은 별개라는 미국의 입장을 어느 정도 반영한 것이다. 북한은 그동안 두 문제를 연계해 왔다. 전반적인 금융제재를 없애야 6자회담에 나갈 수 있다던 ‘고자세’에서 BDA 제재만이라도 풀어 달라는 것으로 요구 수준을 낮춘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
정부 당국자는 9일 “그만큼 북한이 금융제재로 인해 고통을 심하게 받고 있다는 뜻”이라며 “북핵 문제에서 누가 칼자루를 쥐고 누가 칼날을 쥐었는지 애매하던 상황에서 이제 미국이 칼자루를 쥔 상태로 바뀌었다는 점을 북한과 미국 모두 인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국장이 “미국이 관련 정보를 주면 위폐 제조자를 붙잡아 종이와 잉크 등을 압수한 뒤 미 재무부에 통보해 주겠다”고 말한 데서도 북한의 한풀 꺾인 기세가 느껴진다. 북-미 간 첨예한 대립 요인이었던 경수로 제공 시점에 대해 이 국장이 유연성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
문제는 미국의 수용 여부. 일단 수용 가능성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위폐 협의체만 하더라도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수사당국과 피의자 간 협상’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명백한 불법행위에 대해 타협은 없다’는 입장이다.
BDA 문제와 관련해서도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담당 차관보는 8일 “BDA와 핵 프로그램을 혼동해선 안 된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6자회담 미국 측 수석대표인 힐 차관보가 “6자회담 복귀 문제를 놓고 안달복달해야 할 쪽은 내가 아니라 북한”이라고 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은 대북 금융제재의 실효성을 인식한 이후 다소 느긋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국 측이 북한의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한 것은 북-미 접촉에 대한 평양의 향후 대응을 지켜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6자회담 한국 측 수석대표인 천영우(千英宇) 외교통상부 외교정책실장은 이날 6자회담 재개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국하기 전 인천공항에서 기자들에게 “북한이 아직 6자회담에 돌아오겠다는 얘기를 안 하고 있는 상태에서 회담 재개를 예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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