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총리는 고건(高建) 전 총리에 이어 2004년 6월 30일 참여정부의 두 번째 총리 자리에 올랐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등으로 옥고를 치른 그는 첫 운동권 출신 총리라는 기록도 세웠다.
5선 의원에 여당 정책위의장,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나 대통령선거 기획을 담당해 모두 성공할 정도로 뛰어난 실무능력,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질의하는 야당 의원을 주눅 들게 만들 정도의 업무파악 능력으로 그는 과거 ‘대독(代讀) 총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실권을 구사했다.
특히 ‘분권형 책임총리제’란 새로운 국정운영 시스템 덕분에 국무위원 제청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등 이 총리의 권한은 한층 강화됐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도 “나와 천생연분”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전폭적인 신임을 보내 그는 총리 재임 기간 내내 명실상부한 ‘2인자’였다.
하지만 막강한 권력은 독선과 오만을 불렀다. 이 총리는 직선적인 성격을 숨기려 하지 않고 막말을 하는 바람에 여러 번 구설에 올랐다. 한나라당과도 사사건건 마찰을 빚었고, 국회에선 야당 의원들에게 호통을 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지난해 10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국가정체성을 걱정하자 “종교 지도자가 정치적 발언을 하는 의도를 모르겠다”고 비난할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처신도 방만해져 부적절한 골프로 물의도 여러 번 빚었다.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브로커 윤상림 씨와의 골프로 한나라당 홍준표(洪準杓) 의원과 격한 설전을 벌인 다음 날인 3·1절에 부적절한 골프를 즐길 정도였다.
더구나 이 총리는 구설에 오를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 총리는 2004년 10월 “한나라당은 지하실에서 차떼기를 하고…”라는 막말로 2주일가량 국회를 공전시켜 놓고도 ‘사의(謝意)’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비켜 갔다.
특히 야당 인사들이 자신의 부적절한 처신을 지적할 때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으로 대응했다. 이번 낙마도 직접적인 이유는 부적절한 골프지만 그의 독선과 오만에 대해 정치권 안팎의 여론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란 게 일반적인 해석이다.
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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