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의 퇴진은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의 결단인가, 아니면 정동영(鄭東泳) 열린우리당 의장의 ‘절박한’ 설득이 노 대통령의 마음을 돌린 결과일까.
문재인(文在寅)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비롯한 청와대의 핵심부는 11일을 전후한 시점에 이미 총리의 교체가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상황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체 진상조사 결과 이 전 총리의 골프가 부적절했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12일 “노 대통령이 귀국하면 ‘늦지 않게’ 결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 비서진이 총리 퇴진과 같은 중대사에 대해 대통령과 교감 없이 마음대로 언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노 대통령이 총리 퇴진을 결심한 것은 그 이전이라는 얘기다.
대통령의 뜻은 이 전 총리에게도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리는 11일 정 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정 의장도 이 시점에선 총리 교체에 관한 노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정 의장을 비롯한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정 의장의 설득이 노 대통령의 마음을 돌렸다고 강조하고 있다.
![]() |
정 의장은 15일 서울 영등포구 중앙당사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 “14일 오후 청와대에서 2시간여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대통령은 이 전 총리의 유임 쪽 생각도 많이 갖고 있었다”며 “그러나 당의 의견을 깊이 경청했고, 결국 받아들였다”고 소개했다. 노 대통령이 정 의장의 설득 때문에 마음을 바꿨다는 뉘앙스였다.
정 의장 측 관계자들은 14일 저녁부터 “청와대 회동에서 총리 사퇴 문제가 일사천리로 풀린 것은 아니었다”며 정 의장이 ‘쉽지 않은 일’을 관철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청와대의 움직임 등 이 전 총리의 사퇴가 결정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보면 청와대와 정 의장 측이 총리 교체의 모양새를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고심한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를 감안해 총리 교체를 당의 ‘전리품’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정 의장 측의 기본 전략이었다.
정 의장은 13일 노 대통령이 아프리카 순방을 마치고 귀국(14일 오전)하는 대로 이 전 총리를 만나기로 일정을 잡은 반면 자신과의 회동에 대해서는 말이 없자 “선수를 빼앗기는 것 아니냐”며 애를 태웠던 것으로 전해졌다.
정 의장의 한 측근은 “14일 아침까지도 청와대 회동 일정이 안 잡혀서 상당히 초조해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은 14일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내린 뒤 정 의장에게 오후에 청와대로 오도록 연락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하면 노 대통령은 총리 교체 결심을 굳혔으면서도 정 의장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정 의장의 건의를 수용하는 형식을 취했다고 하는 게 타당해 보인다.
열린우리당의 비(非)당권파들이 파악하고 있는 총리 사퇴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비주류의 한 의원은 “실상이 뻔한데도 정 의장 측이 총리 사퇴를 자신의 성과로 돌리기 위해 부질없는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