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8시 반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입구. 음독자살한 아버지 이모(64) 씨의 빈소 주변에서 서성이던 아들(35)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만 되뇌었다.
21일 오후 1시 반경 서울 양천구 신월동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씨는 1965년 9월부터 1년 반 동안 맹호부대원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려 왔다.
아들 이 씨는 “아버지가 20일 갑자기 할아버지 산소에 다녀오시겠다고 했는데 그때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죄인이고 불효자”라며 울음을 삼켰다.
호탕하고 협동심이 강해 고엽제 피해자들 사이에서 ‘쾌남(快男)’으로 불리던 이 씨를 떠나보낸 동료들도 절망감에 말을 잇지 못했다.
문성학(57) 고엽제전우회 서울 영등포지회 사무장은 이 씨에 대해 “명예를 누구보다 중시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보다 더 힘든 고엽제 피해자를 위해 늘 앞장선 분이었다”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명예 회복의 기회마저 갖지 못하는 고엽제 피해자의 절망감을 누가 알겠느냐”고 한숨지었다.
이 씨는 병장으로 제대한 뒤 조선맥주(현 하이트맥주)에서 근무했다.
이 씨에게 잊혀졌던 전쟁의 상처가 엄습한 것은 20여 년 전. 그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다. 걸핏하면 찾아오는 현기증에 당뇨병마저 겹치자 그는 1996년 일을 그만뒀다. 같은 해 그는 ‘고엽제 후유의증환자 경도’ 판정을 받았다.
이 씨는 국가에서 월 20만 원씩 받으면서 고엽제 환자들의 눈물겨운 실상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고엽제전우회 한 지부의 복지부장, 조직부장 등을 맡으며 고엽제 환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에 나섰다. 2002년 폐렴, 2003년 뇌경색과 언어장애, 2004년 대장암 등으로 만신창이가 된 이 씨는 끼니때마다 10여 개의 약을 먹으며 연명했다.
이 씨는 그사이 장애 등급이 ‘고엽제 후유의증환자 중등도’로 한 등급 올라 월 30만 원씩 지원금을 받게 됐다. 이 돈은 그의 우울증과 병을 치료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아들 내외에게 “미안하다”는 전화를 끝으로 제초제를 들이켰다. 결국 제초제의 일종인 고엽제에서 시작된 불행이 제초제로 마감된 셈이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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