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설치된 뒤 동베를린을 탈출하려 한 수많은 사람의 사진과 이들이 사용한 도구들이 전시돼 있다. 쿠션을 들어내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 자동차도 있고, 장벽을 뛰어넘다가 총에 맞아 숨진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도 볼 수 있다. 경비병의 감시 아래 동베를린의 한 아버지가 철조망 너머의 부인에게 아들을 넘겨주는 장면은 가슴을 찡하게 만든다.
여기까지 본 다음이라면, 분단국가에서 온 우리의 머릿속에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기 마련이다. ‘우리처럼 동서독 사이에도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구나. 생사도 모르는 가운데 수십 년을 애태우고 살았겠지.’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1970년 서독은 동독과 교류 협상을 시작했다. 그 후 1976년에만 서독 주민 630만 명이 동독을, 노년층으로 제한된 동독 주민 130만 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방문자는 1980년대 초까지 매년 비슷하게 유지된 뒤 감소했다. 만남에 대한 욕구가 거의 완전히 충족됐기 때문이다. 아들을 철조망 너머 부인에게 넘겨주었던 아버지도 10여 년 뒤에는 부인과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1984년 4만 명에 이르는 동독 노인들이 서독으로 이주해 서독의 연금으로 노후를 보내기 시작했다. 1985년에만 2500명에 이르는 동독 반체제 인사가 서독으로 인도됐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해 남북한 이산가족 방문단이 1만 명을 돌파했다. 정부는 자부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북한에서 상봉 신청을 한 이산가족은 12만 가구를 웃돈다. ‘1만 명’이 동반 가족까지 다 합한 수임을 감안하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성과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것일까. 북측은 최근 남측 방송 관계자의 ‘납북자’ 표현을 트집 잡아 녹화테이프를 탈취했다. ‘납북자를 납북자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것인가. 북한 관영 매체는 남측 대표단장이 사과 문건을 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사과’가 아니라면서도 문건 공개만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다. 이제는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지도’ 못할 지경이다.
다시 독일로 돌아가 보자. 그곳이라고 해서 ‘퍼주기’ 논란이 없었을 리 없다. 1980년대에 서독이 우편료 등의 명목으로 동독에 직접 지불한 금액만 연평균 12억 마르크(약 8000억 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동방정책’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동독이 그 ‘금액’에 어느 정도나마 값하는 행동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누구나 친지를 만날 수 있게 하고, 정치범을 석방하지 않았던가.
도와주는 사람도 상대가 변할 때 도와줄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북의 친지들이 인간다운 삶에 한 걸음씩 다가서는 모습을 볼 수 있어야 ‘도와줄 재미’라도 생길 것 아닌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북한은 외부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를 변화시켰는가, 일가족 우상화가 변화했는가, 폭압적 통치 행태가 변했는가.
만 6년이 걸려서야 고작 수천 명에 불과한 이산가족에게 잠깐의 만남을 제공하고 그나마 상대방의 턱없는 요구에 쩔쩔매기 위해 우리가 들여야 하는 값은 얼마나 되는가.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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