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대부분이 21세기를 장밋빛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미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앞으로의 세계에는 국가 간 전쟁도 아니고 이념 간 싸움도 아닌, 문명(특히 종교) 간 충돌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실제로 20세기 말, 옛 유고에서는 최근 타계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가 주변 무슬림 주민을 학살함으로써 종교전 양상을 드러냈다. 21세기의 원년인 2001년 9월 11일 미국에 가해진 테러 공격은 본격적인 문명 충돌의 시작인 것처럼 보였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는 조직적으로 반미, 반서방 테러를 자행했고, 미국은 이에 맞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이라크전쟁은 이슬람 과격파가 반미 세력을 규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이라크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세계의 역학 구조는 또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인구 규모로 1, 2위를 다투는 아시아의 두 거인 국가 중국과 인도가 오랫동안의 피지배, 혼란과 침체의 역사에서 벗어나 경제적으로 도약하고 군사적으로 실력을 쌓고 있다. 이것은 기존 또는 신흥 강대국 간의 짝짓기 현상을 불러오고 있다. 중국의 부상을 위협과 기회의 두 가지 요인으로 파악하고 있는 미국은 경제 외교 면에서는 중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면서 전략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견제를 시도하고 있다. 인도와의 제휴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인도를 방문해 인도의 핵무기 보유를 사실상 인정하는 핵에너지 협력에 합의했다. 인도는 핵 분야를 포함해 미국과의 협조를 확대하면서도 러시아 중국과의 유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은 ‘평화적인 발전’을 추구할 것이며 미국을 포함한 기존 세력과 질서에 협력하는 게 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와는 군사적으로 공동 훈련을 실시하고, 에너지 분야에서 본격적인 협력을 약속하였다. 인도와는 과거 국경 전쟁의 상처를 씻고 정상급 외교를 통한 협력 증진에 힘쓰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의 ‘패권’을 견제하고 자국의 경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과의 동반 관계를 강조하는 한편, 인도와의 기존 유대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데 힘쓰고 있다. 금년에는 선진 8개국(G8) 의장국을 맡는 기회를 이용해 인도 중국 등을 초청함으로써 그들 나라에 구애 작전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는 아직도 막강한 군사력, 증강되는 경제력, 그리고 세계가 갈구하는 에너지 공급자로서의 위치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새로운 양상의 강대국 게임에 적극 임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면서, 이미 가까워진 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머지않아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예측된다.
이렇듯, 강대국들이 협력하고 경쟁하는 새로운 열강(列强) 정치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인다. 하나는 유대 협력이 선별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유행처럼 사용되는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필요한 분야에서, 편리한 기간에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표면적인 연합 양상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는 과거 분쟁의 역사와 현존하는 갈등의 요인을 갖고 있다. 앞으로 변화무쌍한 합종연횡(合縱連衡)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속담에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코끼리가 사랑의 춤을 추면 풀밭이 망가진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강대국들이 서로 싸우는 것도, 사랑하는 것도 많은 위험이 내포되어 있는 일이다. 우리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과대평가도, 과소평가도 하지 않으면서 전개되는 세태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전 외무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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