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통상부가 이날 공개한 문서는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사건과 주한미군 철수론, 요도호(淀號) 납북 사건 등을 둘러싼 관련국 간 외교협상 과정을 담고 있다. 일반인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외교안보연구원에서 문서를 볼 수 있다.
▽동백림 사건=1967년 재독(在獨) 음악가 윤이상(尹伊桑) 씨 등이 동베를린에서 간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이들을 한국으로 강제 연행한 사건.
공개 문서에 따르면 1969년 1월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대통령은 파울 프랑크 외무부 제1정치국장을 특사로 한국에 파견해 ‘형 확정자 2명은 15일 이내에 풀어주고 재판 계류 중인 윤 씨 등 4명은 1971년 말까지 석방한다’는 비밀 합의를 이끌어냈다.
한국 정부가 서둘러 이에 합의한 것은 ‘불법 연행’에 대한 항의 집회가 잇따르는 등 비판 여론이 유럽 내에서 확산됐기 때문.
1968년 8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정부가 자체 행사에 한국 대사를 초청하자 좌익 학생들은 항의 집회를 열었고, 일부 학생은 태극기에 나치 표지를 붙여 게양했다.
1968년 12월 5일에는 40여 명의 독일 학생이 “동백림 사건 관련자들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주독 대사관에 난입했다. 대사관 측은 “40분간 대사관은 완전히 데모대의 폭력에 맡겨진 상태였다. 기물을 파손하는가 하면 공관 간판에 붉은 페인트칠을 했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곤경에 빠진 최덕신(崔德新) 주서독 대사는 1967년 7월 6일 최규하(崔圭夏) 외무장관에게 “주독 특명전권대사로서 이곳에서 더 복무하는 것이 사태 수습에 도움이 못 된다. 즉시 귀국하도록 하명이 있기를 앙망한다”며 사표를 빨리 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주한미군 철수론=1970년대 중반 미국 의회에서 제기된 주한미군 철수론은 당시 미국이 추진하던 중국과의 화해정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마이크 맨스필드 상원 의원은 1975년 초 작성한 보고서에서 “미국의 대(對)중국 화해정책은 계속 추진돼야 한다”며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 방위계획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으며 거액이 소요되는 군사원조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한국과 대만에 대한 미국의 과도한 군사적 개입이 대중(對中) 화해정책에 방해가 되며 막중한 군사비 부담을 초래하기 때문에 미국의 개입 축소를 건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1975년 5월 외무부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에게 “미 의회 일각에서는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 시 미군의 자동 개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대두하고 있다”며 “미 하원은 미 2사단을 서울 이남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미 국방부에 제출했다”고 보고했다.
▽요도호 사건=1970년 3월 30일 일본 하네다(羽田) 공항을 이륙해 후쿠오카(福岡)로 향하던 일본항공(JAL) 요도호를 납치한 적군파 요원들이 김포공항에 착륙한 뒤 79시간을 대치하다 승객들을 풀어주는 대신 야마무라 신지로(山村新治郎) 일본 운수성 차관을 인질로 삼아 4월 3일 평양으로 떠난 사건이다.
이 사건은 북한이 납치범을 받아들이고 비행기와 승무원들은 일본으로 돌려보내면서 일단락됐다.
일본 정부는 사건이 인명피해 없이 마무리된 데 대해 북한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나 한국 정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윤석헌(尹錫憲) 당시 외무차관은 주한 일본대사에게 “북괴가 비행기의 승객과 기체를 반환한 것은 당연한 일인데 북괴에 ‘감사한다’,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70년대에도 ‘전략적 유연성’ 공방▼
주한미군을 한반도 이외의 분쟁 지역에도 파견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전략적 유연성’ 개념이 1970년대에도 제기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30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의 더몬드 및 스콧 상원 의원은 1974년 12월∼1975년 1월 아시아 9개국을 순방한 뒤 ‘아시아태평양지역의 병력과 정책’이란 보고서를 내고 “주한 미 2사단을 태평양군사령부의 비상대기 병력으로 지명하고 때때로 2사단 병력 일부를 훈련을 위해 다른 태평양 지역에 배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한미 간 주요 현안인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개념과 유사한 것이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해 “한국을 동북아의 전진기지로 삼아 최소한의 중요 거점을 확보하고 주한미군을 ‘기동예비군화’하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또 1975년 2월 26일 미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한 웨이먼드 육군참모총장은 “주한 미 2사단에 배치돼 있는 한국군 장병(8000명) 일부를 1년 이내에 미군 장병으로 교체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정부는 이를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분쟁이 발생해 주한 미 지상군을 파견할 것에 대비해 미군만으로 일원화된 전략 예비 병력체제를 완결하려는 의도”로 분석했다.
1975년 2월 11일 슐레진저 미 국방장관은 오키나와와 괌을 중심으로 미크로네시아∼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전략 거점망에 한국을 편입해 기동성 있는 병력 배치를 완결하는 내용의 국방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美, 언론탄압등 한국 인권문제 거론▼
1970년대 중반 미국은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집중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지금은 북한 인권이 이슈가 되고 있지만, 30년 전에는 한국 인권이 미국의 인도주의 기준에 걸린 셈.
1975년 7월 함병춘(咸秉春) 당시 주미 대사는 한국에 비판적인 앨런 그랜스턴 상원의원을 면담한 뒤 “그랜스턴 의원은 미국 언론이나 의회에 알려진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탄압이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야당 인사의 보다 자유로운 정치활동 허용을 요구했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그랜스턴 의원은 “정치범에 대한 고문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제스 헬름스 상원의원은 6·25전쟁 20주년인 1975년 6월 25일 미 상원 연설을 통해 “한국의 통제된 언론, 정부 전복세력에 대한 가혹한 조치, 행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킨 긴급조치를 옹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한국의 인권문제는 주로 미 의회 내 ‘자유주의’ 성향의 의원들이 제기했다.
주미 대사관 측은 1975년 정세보고서에서 “미 의회의 주류인 자유주의 의원들은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국가에 관한 한 미국의 정치철학과 역행하는 관행을 시정하기 위한 직·간접의 압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분석했다.
물론 한국 정부를 옹호하는 견해도 있었다. 히탐 퐁 상원의원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불완전하고 유치한 단계에 있으나 공산주의보다는 대단히 좋은 것”이라며 “박정희 대통령과 한국 정부를 성급하게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감쌌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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