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출입사무소에서 승용차 번호판을 스티로폼으로 가리고 보닛에 주홍색 깃발을 달았다. 비무장지대 중간에서 한국군과 북한 인민군이 선도 차량을 교대했다.
북한 CIQ 지역에서 차량 검색이 꼼꼼했다. 북쪽 직원이 내비게이션과 음악 CD를 보관했다가 돌아올 때 돌려주겠다고 했다. 뒷좌석에 묵은 신문이 있었던 모양이다. 북쪽 CIQ 직원은 신문을 압수하며 “신문을 왜 갖고 들어옵니까”라고 언성을 높였다. CIQ를 넘어서자 개성공단이 나타났다. 토지공사 개성지사와 공장들이 보였다. 새로 지어 산뜻했다. 그 뒤로 현대아산 중장비들이 기반공사를 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마중 나온 북쪽 여성은 “공단 공사가 계속되면서 개성에 올 때마다 산이 하나씩 없어진다”고 말했다.
북측 민화협 간부가 현대아산 현정은 회장에 관한 평양 시각을 들려줬다. 그는 “정주영, 정몽헌 회장과 함께 일한 김윤규 사장을 미망인(현 회장)이 내친 것은 잘못됐다”며 “미망인이 친정집 배경 때문에 북쪽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현대아산이 북쪽 사업 빼놓으면 별거 있느냐. 우리도 의리보다는 실리로 나갈 것”이라고 여운이 남는 이야기를 했다.
공단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에 선죽교와 고려박물관 관광에 나섰다. 초등학교 역사공부 시간에 고려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 일파에게 살해된 선죽교 돌다리에 지금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다리 상판 베개 크기의 돌에 핏자국 무늬가 들어 있었다. 송도사범대 역사학과 출신 안내원은 조선시대에 후손들이 정몽주의 충의(忠義)를 기려 핏자국 무늬의 돌을 상판에 놓았다고 설명했다.
선죽교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돌다리가 나란히 남아 있는 문화재다. 정씨 문중 사람이 개성 수령으로 부임해 조상의 혼이 깃든 다리를 밟고 다닐 수 없다며 사방을 돌난간으로 막고 통행을 위한 돌다리를 하나 더 놓았다고 한다. 바로 옆에는 명필 한석봉이 쓴 ‘善竹橋(선죽교)’ 비가 서 있었다.
개성 시내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선과 신호등이 없는 길에 자전거가 많이 다녀 운전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일행 중 한 사람이 “1960년대로 돌아가 흑백 영화를 보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고려박물관에는 공민왕릉의 축소모형을 만들어 놓았다. 공민왕이 생전에 7년 동안 축조했다는 공민왕릉은 국보급 부장품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본 놈들이 싹쓸이 도굴을 해 갔다”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예술성이 뛰어난 고려청자가 많았다. 김일성 주석이 1993년 왕건릉을 시찰하고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에서 나왔다. 고려 태조의 왕릉을 웅대하게 복원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복원 공사를 벌이던 중 무덤 주위에서 출토된 왕건 청동상이 6월 서울에서 열리는 북한문화재 특별전에 온다. 당일치기 관광이라 왕건릉, 공민왕릉, 만월대, 박연폭포 같은 유적지를 가보지 못해 아쉬웠다.
토산품을 파는 판매원에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만나봤느냐고 묻자 “일이 고되다더군요. 그래도 남쪽 기업이 많이 왔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북쪽 CIQ에서 내비게이션과 CD를 돌려받았다. 카메라 사진 검열을 받았다. 디지털카메라는 검열이 쉽지만 필름 카메라는 인화를 해야 내용을 볼 수 있다. 북쪽 직원은 “남쪽 출판물에 안 좋은 사진이 가끔 나온다”며 “다음부터 필름 카메라를 갖고 오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북쪽 지역을 벗어나자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남쪽 출입사무소 자판기에서 뽑은 400원짜리 커피 맛이 구수했다. 자본주의에 밴 습관이다.
황호택 논설위원 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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