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보된 충돌…7월이후 “해저지명 등록” “수로측량 강행”

  • 입력 2006년 4월 24일 03시 01분


22일 한국과 일본의 외교차관 협의 결과는 일단 동해상에서 일촉즉발의 물리적 충돌 위험을 피하고 보자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합의에 실패하면 한일관계의 파국이 불가피하다는 절박감이 양측을 압박했다.

이날 협의 결과로 동해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내용을 뜯어보면 갈등의 불씨가 해소됐다기보다는 당분간 잠복했다는 평가가 더 적절해 보인다.

▽7월의 해류관측 계획까지 문제 삼아=일본은 7월부터 독도 근해에서의 수로측량을 다시 강행할 수 있다. 한국도 6월 이후에는 언제든 IHO에 동해 수역의 한국식 해저지명을 등록하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결국 한국은 6월에 해저지명 등록을 하지 않는 대신 이것이 ‘정당한 권리’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일본은 6월 30일까지 예정됐던 수로측량을 하지 않는 대신 그 이후의 가능성을 남겨두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 이번 협의가 깨끗하게 ‘타결’될 수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이 독도를 국제분쟁 지역화하려는 의도를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이번 차관협의에서 7월로 예정된 한국해양조사원의 독도 주변 해류관측 계획까지 새삼 문제 삼고 나선 것은 독도를 끝까지 ‘분쟁 진행형’ 지역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독도 기점으로 하면 남해안에서 손실(?)=이제 관심은 5월 중에 재개될 양국 간 EEZ 경계선 협상으로 옮겨 가게 됐으나 이 협상 또한 쉽지 않을 전망이다.

1994년 발효된 유엔해양법협약에 따라 모든 국가는 연안으로부터 200해리까지의 EEZ 내에서는 자원 독점권을 가진다. 그러나 한일 간에는 해협이 좁아 각각 해안선에서 200해리를 주장하면 겹치는 부분이 생겨 분쟁을 피할 수 없다.

한일 EEZ 협상은 1996년부터 4차례 열렸으나 2000년부터 협상마저 중단됐을 정도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친다.

당시 일본은 독도를 기점으로 독도와 울릉도의 중간선을 EEZ 경계선으로 주장했다. 한국은 당시 울릉도를 기점으로 울릉도와 일본 오키(隱岐) 섬의 중간선을 주장했다.

이는 EEZ 협상이 자칫 독도영유권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하려는 고육책이었다. 울릉도와 오키 섬의 중간선을 경계로 삼아도 독도가 한국 EEZ 내에 위치한다. 또 정부가 독도를 기점으로 삼을 경우 일본은 이를 근거로 동중국해의 많은 암초들을 기점으로 삼아 남해상 EEZ를 자국에 유리하게 획정할 것이라는 우려도 작용했다.

당시 양국은 EEZ 협상이 결렬되자 중간수역을 설정해 공동 조업을 하기로 했다. 중간수역은 독도를 둘러싸고는 있지만 독도와 반경 12해리는 제외됐다. 지금도 독도 12해리에서는 한국만 조업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향후 협상에서 독도 기점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영유권을 확실하게 천명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이 경우도 일본의 독도 분쟁화 기도가 더 노골화되고 남해안 등에서의 경제적 손실이 올지 모른다는 게 정부의 고민이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中언론 “日, 겉으론 양보…챙길건 다 챙겼다”▼

한일 외교차관의 22일 합의는 한국과 일본 중 어느 쪽에 더 ‘남는 장사’였을까.

양국은 서로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23일 브리핑을 통해 “이번 협의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는 표현보다는 일본으로 하여금 높이 올렸던 주장이나 요구 사항의 수위를 조금씩 낮추게 해서 결국은 우리 안을 관철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수로측량 계획을 중지하도록 했고, ‘동해의 해저지명 등록은 한국의 당연한 권리’라는 점을 명백히 했다는 점이 성과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물리적 충돌을 피하게 됐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관방장관은 “국제법에 따라 양국이 서로 냉정하게 대처하고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한 결과”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 외교가 안팎에서는 일본이 명분을 양보하면서 실리를 챙겼다는 평가가 많다. 6월 독일에서 열릴 국제수로기구(IHO) 회의에 한국식 해저지명을 올리는 것을 막았고 국제사회에 독도가 분쟁지역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는 계산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서는 앞으로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곳곳에서 표출됐다.

해상보안청은 “앞으로 일본 주변 해역의 적정한 해도 제작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의 날’을 제정했던 시마네(島根) 현의 스미타 노부요시(澄田信義) 지사는 “다케시마 영토권의 조기 확립을 위해 정부의 지속적인 외교노력을 기대한다”는 담화를 내놓았다.

중국 언론은 일본 손을 들어줘 눈길을 끌었다. 징화(京華)시보 등 중국 언론은 23일 “겉으로는 양국이 한 걸음씩 양보해 서로 손해를 본 게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일본에 더 유리하다”며 “한국은 무력동원 불사 등 강력히 반발해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었으나 이는 일본의 의도와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번 사건은 시종 일본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며 그 근거로 일본이 다시는 측량계획을 추진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은 점과 지금까지 30년 동안 이 해역에서 측량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계획 취소 역시 일본의 손실이 아니란 점을 들었다.

중국은 이번 사태가 동북아 안정에 위협 요인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데다 한일 간 배타적 경제수역(EEZ) 협상의 결과가 동중국해에서의 일-중 분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한일 분쟁을 주목해 왔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베이징=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미국의 힘?…“갈등 풀라” 日야치 방한 전 압력▼

21, 22일 열린 한일 외교차관 협의는 2차례나 결렬될 뻔했지만 그때마다 일본이 추가 협의를 제안해 결국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여기엔 일본에 대한 미국의 비공식 압력도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20일 일본이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외무성 사무차관의 한국 파견을 결정하기 전 일본 측에 “한국과의 갈등을 풀라”며 압력을 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언론들은 미국이 중국의 부상과 북한의 핵개발 문제 등으로 동아시아 정세가 불안한 상황에서 동맹국끼리 갈등을 빚는 데 부담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22일 오전 9시 반에 재개된 2일째 협의는 일본의 수로측량과 한국의 해저지명 IHO 등록 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서 이날 오후 3시경까지 진전을 보지 못했다.

수로측량 문제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 아베 신조 관방장관은 국제전화를 통해 유명환(柳明桓) 외교통상부 제1차관과 협의한 야치 차관을 직접 지휘했다.

아베 장관은 야치 차관에게 “(해저지명 등록 저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이라며 “합의에 상정 저지를 포함시키지 못하면 그냥 돌아와도 좋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3시 반 한국은 ‘회담 결렬’이란 결론을 내렸으며 유 차관은 “협의가 결렬돼 유감”이라는 폐회 인사까지 했다. 외교부는 “오늘 오후 5시 외교부에서 브리핑을 열어 협의 결렬을 공식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야치 차관이 ‘추가 협의’를 제안하며 한발 물러섰다. “수로측량 ‘연기’가 아닌 ‘중지’로 양보하겠다. 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돌아가겠다”며 해저지명 등록 철회를 요구했던 것. 그러나 유 차관은 “해저지명 등록은 한국의 권리”라며 양보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배석자들을 대부분 내보내고 2시간가량 머리를 맞댔지만 합의를 보지 못했다.

유 차관은 오후 6시 반 외교부로 돌아가 기자단에 ‘협의 결렬’을 전하기 위해 호텔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왔다. 이때 일본 측이 ‘최후 담판’을 제의해왔다.

재개된 협의에서 한국은 ‘해저지명 등록을 6월 독일에서 열리는 IHO 회의가 아닌 적당한 시점에 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야치 차관은 일본 총리관저로부터 “이제 그만 결론을 내라”는 지시를 받고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한편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가 야치 차관을 통해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에게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친서를 전달하는 방안을 검토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이명건 기자 gun4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