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의원들 어떻게 사나]‘왕년의 헌법기관’ 퇴물 취급

  • 입력 2006년 5월 2일 03시 00분


《2004년 17대 총선에서 67.8%(185명)의 현역 의원이 대거 낙선했거나 출마를 포기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1948년 5월 제헌국회가 개원한 이래 지금까지 배출된 의원은 17대 현역 의원까지 포함해 2473명. 본보와 부산 동의대 선거정치연구소는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의원 800∼900명 중 해외 체류자와 주소 불명자 등을 제외한 317명을 대상으로 사회 경제적 생활 실태 전반을 조사했다. 국회의원들의 ‘몸값’이 예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전직 의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집중 탐사함으로써 국회의원이 되려는 정치 지망생들에게 나름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 위한 의도에서다.》

카펫이 깔려 있는 15평 남짓한 방에는 양복 차림에 모자를 쓴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바둑이나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낮 12시가 되자 이들은 “밥이나 먹으러 가자”며 주섬주섬 일어섰다.

옆방에 있던 직원은 그들에게 종이쪽지 한 장씩을 나눠 줬다. 인근 식당에서 7000원 상당의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식권이다.

서울시청 옆에 위치한 ‘대한민국 헌정회’ 사무실에서 요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전직 국회의원들의 단체인 헌정회에 매일 식권을 받으려고 오는 사람은 40명가량이다. 이들은 서로를 부를 때 꼬박꼬박 ‘○ 의원’이라고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386들이 설친다”는 한숨소리도 나온다.

▽‘화려했던 날은 가고’=4, 6대 국회의원 출신인 K(85) 씨는 가끔 이 식권으로 점심을 먹지 않고 현금으로 바꾸는 ‘깡’을 한다. 치매에 걸린 부인을 데리고 와서는 “이틀에 한 번씩 올 테니 매일 오는 것으로 치고 식권을 2장 달라”고 해 부인과 함께 점심을 먹는다.

국회부의장을 지낸 J 씨. 한때 야당의 거물이었던 그는 몇 해 전까지 서울 구로구 온수동의 13평짜리 다세대주택에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헌정회 주소록에는 경기 부천시 역곡동에 살고 있는 것으로 돼 있으나 본보가 확인해 본 결과 해당 주소지는 재개발로 헐린 상태였다. 치매 증상과 시력 저하 때문에 누가 찾아왔는지도 알아보지 못한 지가 몇 년 됐다는 것이 지인들의 기억이다.

별세한 2대 국회의원 W 씨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연탄 배달을 하다가 전직 동료들을 만나 얼굴을 붉혀야 했다. 14대 국회의원이었던 L 씨는 딸 집에 얹혀살고 있다.

L 씨의 딸은 헌정회가 매달 지급하는 100만 원의 ‘연로회원지원금’(일종의 연금) 외에 30만 원씩을 더 달라고 요청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난해 말 헌정회를 찾아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아버지를 양로원에 보내겠다”는 ‘협박’을 하고 돌아갔다. 헌정회 김형래(金熒來) 대변인은 “헌정회를 찾아오는 회원의 95%는 무직”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을 했다고”=물론 이들에 대한 차가운 시각도 엄존한다. 국회의원 재임 시 무슨 대단한 일을 했느냐는 것이다.

헌정회는 전직 의원들이 만 65세가 될 때부터 사망 시까지 매달 100만 원씩의 연로회원지원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17대 원내 진출 이후 국회의원의 특권 폐지 차원에서 전직 의원들에게 지급하는 지원금의 축소를 추진하고 있다. 민노당 심상정(沈相정) 의원은 “단 한 번 국회의원을 했다는 이유로 노후를 다 챙겨 주는 것은 예산 낭비”라고 주장했다.

물론 재임 때와 다름없이 ‘잘나가는’ 전직 의원들도 없지 않다. 9, 10, 13, 14대 국회의원과 경제부총리를 지낸 이승윤(李承潤) 전 의원은 1일부터 요르단 암만에서 열리는 전직 국가수반회의에 참석 중이다. 재산도 넉넉한 데다 금호그룹 고문과 한일협력위원회 상근부회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국회의원 경력이 오히려 ‘제2의 인생’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많다. 13대 국회의원을 지낸 K 씨는 “돈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녀도 아무도 서민적이고 청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은 “어려운 현안이 있을 때 원로들의 의견을 전혀 구하지 않는 사회 풍토도 문제지만, 의원들도 국가 정체성의 중심으로서 사회에 봉사하고 스스로 가치와 품격을 높이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성 여부가 직업과 소득 좌우=전직 의원의 학력이 낮을수록 월수입이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고졸 이하인 전직 의원의 경우 ‘월수입이 없다’는 응답이 42.9%인 반면 대졸 이하에서는 28.0%, 대학원 재학 이상에서는 20.8%에 그쳤다.

직업별로는 의사 약사 변호사 등의 전문가 집단과 자영업, 기업 임원 등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전직 의원들의 월수입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재산의 경우에도 고졸 이하 학력자의 57.1%는 ‘부채가 많다’고 답한 반면 30억 원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전직 의원은 모두 대학교 재학 이상의 학력 소지자였다.

또한 다선의 전직 의원일수록 재산가가 많았고, 선수(選數)가 낮을수록 ‘부채가 많다’거나 ‘재산 없음’이라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박성원 기자 swpark@donga.com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조사분석에 도움 준 교수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김석우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임성학 서울시립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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