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 집에서 열린 4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남측이 북측에 제의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문제와 이종석(李鍾奭) 통일부 장관의 남북협력기금 관련 발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장성급 회담에서 남측은 “서해 NLL을 비롯해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에 포함된 군사적 합의사항 이행 문제를 남북 국방장관 회담에서 협의하자”고 제의했다. 물론 ‘NLL 존중’이라는 전제가 붙기는 했지만 이 제의는 NLL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해 온 지금까지의 입장과 비교할 때 상당한 태도 변화로 여겨진다. 또 이 장관은 17일 보도된 ‘한겨레’ 온라인 영문판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협력기금이 1조2000억 원인데 명분이 있고 국민이 양해해 준다면 그것을 다 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측이 요구해 온 제도적 물질적 요구와 실제 남측의 지원, 향후 추가 지원 가능성 및 문제점 등을 점검해 봤다.》
■제도적 지원
북한은 올 4월 18차 장관급 회담에서 “낡은 대결시대의 관행과 관습, 제도적 장벽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북한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낡은 대결시대의 관행’이자 ‘제도적 장벽’. 북한은 3월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남측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NLL은 냉전의 유물”이라며 NLL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고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국방부 측은 NLL 재설정은 불가능하다고 일축하고 있다. 국방부 관계자는 “영토주권을 양도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NLL 재협상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16일 남북 장성급 회담에서 남측은 해상불가침경계선 재설정을 논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서해상 경계 문제에 민감해 하는 북한에 신축성 있는 자세를 취한 것으로 앞으로 남북 논의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4월 평양에서 열린 장관급 회담에서 북측은 김일성(金日成)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과 혁명열사릉, 애국열사릉 등에 대한 남측 인사의 참배를 강하게 요구했다.
2005년 8월 ‘8·15 60주년 기념행사’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던 김기남(金基南) 노동당 비서와 임동옥(林東玉) 통일전선부장 등 북측 대표단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한 뒤 남측에도 ‘상응한 조치’를 요구하고 있는 것. 하지만 금수산기념궁전 등에 대한 참배 허용은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실정법 위반이어서 정부가 난감해 하고 있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한반도 비핵지대화’도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지난해 6월 정동영(鄭東泳) 당시 통일부 장관과의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훈(遺訓)”이라고 말해 유사시 남측에 배치될 수 있는 미군의 전술 핵을 차단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한미 연합군사훈련 중단은 북측이 가장 집요하게 남측에 요구하는 것. 정부는 한미 군사훈련이 방어훈련이고 한미동맹의 상징인 만큼 중단을 선언하기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다만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한미 군사훈련에 대한 북한의 불안감을 ‘이해’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은 주목해 볼 만한 대목이다.
국보법 폐지 요구는 북측이 적화통일을 규정한 노동당 규약을 철폐하지 않았음에도 남측에서 폐지 논란이 분분했던 경우.
2000년 8월 남측 언론사 사장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규약을 개정할 수 있으며 국보법과 연계하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발언은 실천되지 않았다. 그래도 남측에서는 2004년 말 국회에서 개폐 논란으로 시끄러웠으나 여야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처럼 개별 사안을 들여다보면 남측도 ‘제도적 양보’를 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자칫하면 국론분열과 남남갈등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발언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식으로 구체화될지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물질적 지원
북한에 대한 ‘물질적 지원’은 노무현 정부가 ‘평화번영정책’이란 이름 아래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다.
남측은 남북협력기금을 조성해 1991년부터 16년 동안 북한에 5조7560억 원에 이르는 정부 차원의 지원을 제공해 왔다.
비료와 식량에 대한 지원은 북측의 집요한 요청으로 이제는 정례화 단계에 이른 것으로 평가된다. 규모는 비료의 경우 30만 t(수송비 포함해 약 1200억 원), 식량차관의 경우 40만∼50만 t(수송비 포함해 약 1500억 원)이 매년 북한에 지원되고 있다.
경의선, 동해선 철도 및 도로 연결사업, 백두산 관광인프라 제공사업, 금강산 면회소 건립 공사대금 등 북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굵직한 토목공사도 대부분 남측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남북협력기금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4월 30일 현재 2006년 기금 사용 액수는 4672억 원. 주요 내용은 개성공단 기반시설 건설비용 지원사업과 동해선 철도연결 사업지원, 대북 연료지원 등이다.
이번 달 말에 열리는 12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에서는 신발 의류 비누 등 3대 경공업 원자재를 북한에 제공하는 문제가 전격 합의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측은 반대급부로 북한 지역에서 광산물 등을 채굴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남측의 ‘돈맛’을 본 북측의 요구액도 점차 커져가고 있다. 통일부 남북경제협력국이 지난해 2월 작성한 ‘북한이 필요로 하고 희망하는 경제협력사업’ 문건에 따르면 북측은 에너지, 사회간접자본 분야 등 16개 사업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북측 요구사업을 모두 들어줄 경우 소요되는 예산은 최소 8조2265억 원에서 최대 12조4415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래저래 남북협력기금의 대폭적인 증액이 불가피해지는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대북전력지원 소요예산 등을 고려해 정부가 예산에서 지원하는 정부출연금의 규모를 1조1000억 원으로 늘리려고 했으나 야당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조성하는 공공자금관리기금 예수금을 동원해 1조5965억 원의 협력기금을 추가로 확보해야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세수(稅收) 부족을 호소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빚으로 계상되는 국채를 발행해 대북지원자금으로 전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한다.
고려대 북한학과 남성욱(南成旭) 교수는 “정부 출연금과 달리 상환 의무가 있는 예수금 사용이 증가함으로써 기금의 부실화가 우려된다”며 “1년 예산이 130조 원임을 감안할 때 협력기금이 3조 원을 넘으면 재정상 버티기가 힘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는 17일 경수로사업 기획단 관계자들을 초청해 ‘경수로사업 종료와 북한 에너지개발 방안’을 주제로 간담회를 가졌다. 간담회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경수로 사업을 위한 누적 국채 발행액이 2조7627억 원이며 이 중 9967억 원을 상환하고 1조7660억 원이 빚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태원 기자 taewon_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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