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노무현 김대중 김정일의 ‘3者 게임’

세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다. 결과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우리로선 전혀 새로운 경험이다. 남한의 전현직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 동지가 남북문제를 놓고 이런 식으로 엉킨 적이 없기 때문이다. ‘3자 게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설명하고 6자회담에 나오도록 설득해 줬으면 한다.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회담에 나오고 싶어도 명분이 없어서 못 나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냥 나가면 미국의 압박에 굴복한 꼴이 되므로 DJ의 방북을 명분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의제도 6자회담과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정해 주기를 바란다. 공연히 연합제니, 연방제니 해 봐야 역풍(逆風)만 일으키고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종석 통일부 장관이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DJ가 북측과 그런 논의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그 대신 정상회담은 어떻게든 성사시켜 주기를 바랄 것이다. 노 대통령은 갈수록 정상회담에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3년 전 대북(對北) 송금사건을 특검에 넘김으로써 DJ와의 단절을 꾀했던 그가 DJ 덕에 남북 정상회담을 하게 된다면 아이러니다.

DJ의 생각은 다를 것이다. 6자회담도 중요하지만 그에겐 그리다가 만 ‘큰 그림’이 있다. 6·15공동선언의 실천을 통한 통일 논의의 마무리가 그것이다. 6년 전 김 위원장과 마주 앉아 자신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에 공통점이 있으므로 그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자고 했던 DJ다. 그런 그가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하고 넘어갈까.

어떤 경우에도 DJ가 노 대통령의 ‘메신저’ 역할만 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그가 노 대통령의 ‘특사’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방북하겠다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방북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과 뭐든 자신이 직접 매듭짓겠다는 의지 탓으로 읽힌다. 일이 잘돼 김 위원장이 6자회담 복귀를 선언하면 그것은 ‘특사 DJ’가 아닌 ‘개인 DJ’가 얻어 낸 성과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해서일까. 정부도 ‘특사’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이 장관은 ‘전직 대통령 자격’이라는 군색한 대안까지 내놓았다. 여권(與圈) 일각에선 “정부의 지원과 협조로 방북하면서 ‘개인’ 자격을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김 위원장으로선 꽃놀이패를 든 셈이다. 남한의 현직 대통령은 “언제 어디서나 만나고 싶다”고 하고, 전직 대통령은 비록 자신이 초청했지만 서울 답방 약속을 지키지 않았는데도 또 만나러 온다고 한다. 아버지 김일성 주석인들 생전에 이런 ‘호사’를 누렸을까. 두 사람 모두 상대하기 어려운 선수들도 아니다.

전직 대통령은 통일 방안을 끄집어내 남한 사회를 흔들기에 좋은 상대이고, 현직 대통령은 경제적 도움을 얻어 내기에 쉬운 상대다. 당사자들은 펄쩍 뛰겠지만 노회한 김 위원장이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다. DJ를 만난 자리에서 ‘연방제’를 꺼내는 순간 남한 사회는 또 한번 갈라지고 찢길 것이다. 6자회담 복귀 의사를 살짝 내비치기만 해도 대규모의 지원이 쏟아질 것이다. 이미 남측 통일부 장관은 “명분만 있으면 1조2000억 원의 남북협력기금을 다 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난해 당시 통일부 장관은 그 자리에서 200만kW 전력을 주겠다고 했으니 최소한 그보다는 많아야 한다고 김 위원장은 생각할 것이다.

‘3자 게임’의 구조와 전개 양상이 이렇다. 김 위원장이 정말로 마음을 비우지 않는 한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이용당하고 끌려 가는 게임의 기본 틀을 바꾸기가 어렵다. 그나마 덜 당하려면 열세에 놓인 쪽끼리 같은 목소리를 내야 할 텐데 이도 쉽지 않은 일 같다. 노 대통령과 DJ가 과연 사전에 치밀하게 손발을 맞추겠는가. 개인적으로는 회의적이다. 오히려 경쟁하는 듯한 분위기마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에 많은 양보를 하겠다”고 먼저 말하는 것은 현책(賢策)이 아니다. 지금은 어쩌면 게임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든지, 아니면 게임판 자체를 뒤엎어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이재호 수석 논설위원 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