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사망한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선출직 유엔전문기구의 수장을 지낸 첫 한국인이다. 그러나 그의 삶은 ‘권력’에 영합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늘 힘없는 사람을 향했고 그의 발걸음은 늘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빈민과 함께했다.
그는 여느 의사와 출발부터 달랐다. 1973년 3월 그는 동기생들보다 여섯 살이나 많은 나이에 서울대 의대에 입학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동기생들은 그가 이미 서울대 공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를 뒤늦게 의사의 길로 이끈 것은 봉사에 대한 남다른 신념이었다. 이 총장과 동기생인 서울대 의대 소아과 김중곤 교수는 “그는 테니스에서는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했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막내 동생뻘인 동기생들에게도 온화한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었다”며 “그러나 가장 기억나는 것은 정력적인 봉사활동이었다”고 회고했다.
의대 재학시절 내내 그는 경기 안양시 라자로마을에서 한센병(나병) 환자를 돌봤다. 평생 반려자가 된 일본인 동갑내기 가부라키 레이코 씨도 그때 만났다. 가부라키 씨는 당시 가톨릭신자로 한국에 봉사활동을 나와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3년 뒤 가부라키 씨와 단출한 살림을 꾸렸다.
대학 졸업 후에도 그는 개업을 하지 않았다. 잠시 춘천의료원에서 환자를 돌봤지만 그 역시 봉사의 차원이었다. 부부는 바로 태평양의 사모아 섬으로 날아가 새로운 봉사인생을 시작했다.
2003년 1월 그는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WHO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당시 WHO는 그의 당선을 ‘인류애의 승리’로 치켜세웠다. 그가 속했던 결핵국 직원들도 환호성을 올렸다.
WHO 본부 예방백신사업국장 시절 그는 소아마비 유병률을 세계인구 1만 명당 1명 이하로 떨어뜨렸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성과였다. 이후 그는 ‘백신의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또 빌 게이츠 등 유명인사들에게서 에이즈 등 각종 질병 퇴치 기금을 따내는 등 ‘펀딩 능력’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지난달 타임지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 한 명인 미국 하버드대 의대 김용 교수도 “이 총장은 행정능력이 천재에 가까울 뿐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스마트한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최근까지 이 총장은 조류 인플루엔자(AI)의 발병을 경고하고 금연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해 왔다.
총회 참석차 제네바를 방문 중인 마이클 리빗 미국 보건부 장관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 총장이 한국전쟁 당시 모친과 함께 수개월간 부친을 찾아다녔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아마 그런 유년기의 경험이 그가 봉사와 공공 서비스에 헌신하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침 제네바에서 열리고 있는 총회에 참석한 전 세계의 보건의료인들이 그가 없는 WHO를 걱정하며 슬픔에 잠겨 있다.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WHO총회 애도속 개막▼
중국을 방문 중인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이종욱 WHO 사무총장의 급서 소식을 듣자마자 성명을 내고 “충격을 받았다”며 “이 박사는 WHO 총회가 개막된 오늘 서거했다”고 애도했다. 아난 총장은 또 “서울에 머물면서 이 박사와 에이즈 및 말라리아 퇴치 사업을 놓고 전화로 대화를 나눈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날 개막된 WHO 연례총회는 애도와 묵념으로 시작됐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눈물을 흘리는 WHO 직원들도 적지 않았다. 총회 의장인 엘레나 살가도 스페인 보건장관은 개막 직후 “그는 우리 보건장관들이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는 가까운 사람, 비범한 인물, 비범한 리더”였다고 말했다.
니컬러스 손 유엔 주재 영국대사는 AFP통신과의 회견에서 “그는 아주 효율적으로 WHO를 이끌어 온 무척 중요한 인물이었으며 이제 192개 회원국이 그에 필적하는 후임자를 선출하려면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연례총회가 열리고 있는 유엔 유럽본부는 고인에 대한 애도의 표시로 본부 내 유엔기를 조기로 게양했으며, WHO 사무국은 유족 측이 WHO장(葬)을 희망하면 이를 수용할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관계자들이 전했다.
한편 WHO는 이 총장이 급서함에 따라 안데르스 노르드스트롬 총무담당 사무차장이 총장 대행을 맡게 됐다고 밝혔다.
김창혁 기자 chang@donga.com
▼이종욱 사무총장 장례식 24일 WHO장으로▼
고(故) 이종욱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의 장례식이 24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WHO장(葬)으로 치러진다.
부인 가부라키 레이코 여사를 비롯한 유족들은 22일 WHO측과 협의를 거쳐 가톨릭 의식으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장례식은 24일 제네바 중앙역 부근의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고 이 총장은 21일 의식 불명 상태에서 가톨릭 신자인 레이코 여사의 희망에 따라 가톨릭 영세를 받았다. 유족들은 장례식을 마친 뒤 고인의 시신을 화장해 유해를 서울로 운구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최 혁 제네바대표부 대사가 전했다.
이 총장의 타계 소식을 접한 세계 각국과 주요 인사들의 조문은 22일 늦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 총장을 2차례 만난 뒤 그를 '굿맨'이라고 추켜세웠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자신과 부인 로라 여사가 타계 소식을 듣고 슬픔에 잠겼다고 밝히며 "이 박사는 세계 최고의 보건책임자로서 폐결핵과 에이즈에서 소아마비 근절에 이르기까지 수백 만 명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지칠 줄 모르게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어 "이 박사가 조류인플루엔자(AI)를 비롯해 21세기의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국제사회에서 비범한 지도력을 발휘해 왔다"면서 애도를 표했다.
류젠차오(劉建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이 총장의 타계로 WHO는 뛰어난 지도자를 잃었고 중국도 진실한 벗을 잃었다"며 조의를 표했다.
리철 주 제네바 북한 대사는 WHO 총회가 열리는 유엔 유럽본부 내 대회의장 옆에 마련된 조문록에 애도의 글을 남겼다.
리 대사는 조문에서 "이종욱 선생이 사람들의 건강과 복지에 바친 공적은 우리 뿐 아니라 후대에도, 오늘은 물론 내일에도 길이 남아 찬양을 받을 것"이라며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리 대사는 이 총장이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21일 고인이 입원해있던 제네바 칸톤 병원을 방문해 부인 레이코 여사에게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제네바=금동근특파원 gold@donga.com
▼盧대통령, 유족에 위로 전문▼
노무현 대통령은 22일 이종욱 WHO 사무총장 별세에 깊은 애도를 표하고 부인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노 대통령은 전문에서 “우리 국민은 이 총장이 WHO에 평생 몸 바쳐 국제보건 협력의 강화와 전 세계인의 건강 증진에 크게 기여한 점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연욱 기자 jyw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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