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고개’ 잘 불렀던 전교 수석
넘치는 ‘끼’ 간직한채 정치권으로
“한 여자가 있었다. 초중고교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최초의 여성 법무부 장관이 됐다.”
“또 한 여자가 있었다. 가난으로 등록금을 못내 울었다. 남편은 걸핏하면 구속됐다. 아이를 갖고 싶었지만 실패했다. 여전히 눈물이 많다.”(‘두 여자 이야기’)
열린우리당 강금실 서울시장 후보가 유권자들에게 보낸 선거 공보물에 소개한 자신의 양면이다. 강 후보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스스로도 “상처도 많고, 영광도 많다”고 했다.
강 후보는 학창 시절 수석을 놓치지 않은 모범생이었지만 공부만 하는 ‘범생이’는 아니었다. 수업 시간엔 “노래를 불러보라”는 선생님의 권유에 흐드러지게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불렀다. 여고 동창생인 열린우리당 조배숙 최고위원은 “금실이가 가장 좋아했던 곳은 도서관이 아닌 무용실이었다”고 했다.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후엔 “탈춤반에서 운동권 친구들과 사귀면서 서서히 사회 문제에 눈을 뜨게 됐다”고 한다. 공부보다 헤겔(변증법적 유물론을 주창한 독일의 철학자)과 루카치(헝가리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의 책을 더 즐겨 읽었다.
그가 ‘사회 참여’에까지 관심을 갖게 된 데는 4년여 열애 끝에 결혼한 전 남편 김태경 씨도 영향을 미쳤다. 김 씨는 서울대 철학과 출신의 ‘골수 운동권’으로, 훗날 출판업을 하며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번역 출간했다.
14년간의 판사 시절엔 국가보안법의 맹점을 비판하기도 했고, 1993년엔 동료 판사들과 법원 민주화를 요구한 이른바 ‘사법파동’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면에 있는 ‘자유인의 끼’는 숨기지 못했다. 인간문화재 김수악 씨로부터 ‘살풀이춤’을 사사했고, 지인 가운데 문인 화가 시인 철학자가 많았다.
모범생이면서 끼가 있고, 판사로서 사회제도를 지키면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양면성은 강 후보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첫 번째 매력 포인트다.
2003년 46세의 나이로 노무현 정부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발탁돼 국회에 출석했다가 의원들끼리 언쟁하는 장면을 보곤 “코미디야, 코미디. 호호호”라고 했고, 장관 퇴임 때는 “너무 즐거워서 죄송해요”라고 했다. 장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파격과 자유가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자리’에 앉히고 싶어하는 역설을 불러왔다.
하지만 정치권 밖에 있을 때의 ‘끼’와 ‘자유’가 정치권 안에 들어와서도 꼭 먹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감수성은 예측불허로, 예측불허는 불안감으로 비치기도 한다. 일각에선 강 후보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신선함에서 강 후보와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가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강 후보가 불안하기 때문”이란 해석도 나온다.
강 후보를 돕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한 의원은 “불쑥 예기치 않은 행동을 하고 나설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의 강 후보를 만든 것은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열정과 ‘재미’다. 지지도는 20% 미만으로 떨어졌지만 강 후보는 여전히 낙관적이다.
그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 마지막 3일 동안 밤을 새워 ‘72시간 마라톤 유세’를 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다. 저혈압이 심하다는 점에서 주변에선 만류했지만 그는 “재미있잖아요”라고 했다고 한다. 한 지인은 “위기에 대처하는 남다른 대응방식이야말로 강금실의 매력”이라고 평가했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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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깔린 집 꿈꿨던 달동네 소년
변호사 된 후 사회 참여 활동 적극
잘생기고 훤칠한 외모, 국회의원을 지낸 성공한 변호사. 그래서인지 한나라당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에게는 늘 ‘귀공자’ 이미지가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가 23세 때 사법시험에 합격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기 이전까지는 달동네를 전전하며 어렵게 성장한, 가난한 집의 장남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삼양동(지금의 강북구 미아동) 달동네에 살 때에는 집에 전기가 안 들어와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고 한다. 용돈을 벌기 위해 새를 키워 팔기도 했다. 우연찮게 새끼 한두 마리를 얻어 키워 판 것이 계기가 돼 그의 집에는 잉꼬, 카나리아 등이 우글거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잔디 위에 테이블을 놓고 차를 마실 수 있는 집’을 꿈꿨다. 그가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빌라에는 잔디 마당과 테이블 등 어린 시절 그의 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학 시절, 손아래 친척이 회장으로 있는 회사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회장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춘다는 말을 듣고 “절대 샐러리맨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사시 공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결국 합격했지만 그는 “배낭여행 한번 못 가고 사시 공부한 것이 최악의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그의 한 지인은 “오 후보가 당시 친구들이 한창 학생운동을 할 때 사시 공부만 한 것에 대해 일종의 채무 의식을 가졌던 것 같다”며 “변호사 개업 이후 활발하게 사회참여 활동을 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94년 한 아파트의 일조권 소송을 맡으면서 환경운동연합과 인연을 맺어 이 단체에서 무료법률상담을 맡았다.
대한변호사협회의 당직변호사로 무료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도 했다. 한번은 3가지 사건이 한꺼번에 들어와 하루 종일 서울 전역의 경찰서를 돌며 처리한 일도 있다.
그가 오늘날 ‘산뜻한 개혁’ 이미지를 얻고 있는 것은 이런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혹자는 그를 ‘백조의 발’에 비유하곤 한다. 보이지 않는 데서 엄청난 노력을 한다는 얘기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고집스러운 스타일이다. 그의 지인들은 “오 후보는 수줍음을 많이 타고 남에게 부탁을 잘 못한다”고 말한다. 국회의원 시절에는 “후원금을 달라”고 부탁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지금도 선거운동을 하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일이 많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해 남에게 진다는 생각이 들면 참지 못한다고 한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귄 아내와 함께 고려대에 시험을 봤으나 자신만 낙방하자 아내와 같은 대학을 다니려는 일념으로 다른 대학에 들어간 뒤 기어코 고려대에 편입을 했다. 동갑이라 결혼을 반대했던 장모는 5년여 동안의 지극정성에 결국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중학생 때는 학급 ‘짱’이었던 한 급우가 수업 분위기를 흐리자 주번이던 그가 “그러지 말라”고 대들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기도 했다.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결심한 것도 ‘오기’ 때문이었다. 환경운동을 하던 시절 관련 법안을 내기 위해 국회를 찾아다녔으나 의원들이 여간해서는 나서지 않더라는 것. 그는 ‘내가 직접 국회의원이 되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을 했고 결국 16대 총선 때 출마해 뜻을 이뤘다.
17대 총선 불출마 선언 후 서울시정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부해 왔다는 사실에서 서울시장에 대한 그의 집념을 읽을 수 있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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