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1998년 봄. 독일인들이 인삼위기(Ginseng-Krise)라 명명했던 외환위기가 진정 국면으로 들어선 무렵이다. 베를린 장벽 너머로 도심개발의 활기가 넘쳐났다. 그러나 한눈에 구별되는 구동베를린 주민들의 모습에는 시장경제에 대한 피로감도 배어났다.
독일은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찰나의 틈새를 포착하여 1990년 통일을 밀어붙였다. 동독 주민들의 염원을 받아들여 1 대 1 통화통합까지 단행했다. ‘공돈’이 두둑해진 동독인들이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며 관광지를 뒤덮은 것도 잠깐. 4배의 임금 부담과 동유럽권 시장 상실에 직면한 동독기업들은 뿌리째 뽑혀 나갔다. 1998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노점상에서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담긴 구동독 100마르크 지폐는 단돈 25마르크에 팔리고 있었다.
1989년 6월 톈안먼의 비극은 동독 반정부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10년여 세월이 지났다. “한 톨의 불씨가 온 들판을 태운다” 했던가. 가난에서 탈출하려는 안후이(安徽) 성 농민들의 생존 몸부림이 결국 상하이 둥팡밍주(東方明珠) 탑의 휘황한 불빛을 점화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발터 몸퍼 시장은 “독일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국민”이라 자축했다. 하지만 구동독지역에서는 통일 전의 생산수준도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만주, 2004년 겨울. 남북회담의 불법 뒷거래 논란이 잦아들 무렵, 나는 압록강변에서 국경 소도시 만포를 건너다보고 있었다. 6·25전쟁 때 쓰였던 것 같은 소련제 지프가 거리를 오간다. 유리창이 제대로 끼워진 집을 찾아보기 어렵다. 맑디맑은 압록강을 건너오는 순간 인신매매 조직의 마수가 기다린다는 게 동행한 인민법원 판사의 귀띔이었다.
‘마르크’에 병탄당한 동독의 몰골은 북한을 ‘흡수에 대한 공포’로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먹고살 만해진 ‘다거(大哥·맏형)’ 중국의 지원은 빈사상태였던 북한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었다. 역사의 이 기막힌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어느 길을 찾아가야 하는가.
독일 통일의 ‘악몽’에 가위눌린 사람들은 예기되는 막대한 통일비용을 감안해 대북지원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개혁의 ‘성공’에 고무된 사람들은 북한도 완만한 체제전환을 통해 시장경제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는 독일의 교훈을 바로 알아야 한다. 물고기 잡는 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물고기를 계속 던져 주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원조 방법이다. 우리가 진정 본받아야 할 것은 천문학적인 대동독 재정지원이 아니라 그러한 지출을 감당할 수 있었던 ‘준비된 국가’ 서독의 막강한 국력이다.
우리는 중국의 교훈도 바로 배워야 한다. 원시자본의 축적을 위해 100만 감군을 단행했으며, 사회주의의 원칙을 굽혀 ‘홍색 자본가’를 받아들였으며, 대국의 자존심을 버리고 앞선 나라들에 가르침을 구했다. 우리가 진정 부러워해야 할 것은 체제전환의 난국을 슬기롭게 넘긴 중국 지도부의 유연한 사고방식이다.
서울, 2006년 봄. 조건 없이 제도적 물질적 지원을 하겠다는 대통령의 발언, 남북교류협력기금 1조2000억 원을 다 쓸 수 있다는 통일부 장관의 발언을 비웃기나 하듯, 북한은 남북철도 시험운행을 돌연 취소했다. ‘선군정치’를 부르짖는 지도부와 비 맞는 ‘장군님’ 사진에 눈물짓는 인민. 이들에 대한 무조건의 일방지원이 과연 한반도에 평화 자유 민주를 가져다줄까. 늑대에게 고깃덩이를 계속 던져 주면서 초식동물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꼴은 아닐까.
신우철 중앙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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