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 지방선거에선 선거법의 개정으로 외국인 영주권자 6579명과 19세 청소년 61만 8052명이 첫 투표권을 행사하게 됐다. 이들은 투표일인 31일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화교 양충승(54) 씨에게 이번 투표는 큰 가족행사다.
양 씨의 부모는 1948년 중국 산둥성(山東)에서 한국으로 이주했다.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사유재산을 몰수당한 양 씨의 부모는 생계를 잇기도 힘들어지자 고향을 등졌다.
양 씨는 비록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투표권이 없어 선거 때만 되면 '이방인'이란 소외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이웃들이 "투표했느냐"고 묻는 것이 싫어 선거일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정도다.
그는 "지난 대통령선거 때 아내와 누구를 지지하느냐을 놓고 부부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면서 "부부싸움 이후 분이 안 풀린 상태에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투표권도 없는 데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 허탈했다"고 말했다.
양 씨는 특히 아들과 딸이 "왜 우리는 투표를 못하느냐"고 물을 때마다 자녀들에게까지 소외감이 대물림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양 씨는 자녀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된다. 그는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는 아들과 딸도 어떻게든 선거에 참여하겠다며 대학생 부재자투표를 했다"며 "투표권은 가족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이화여대 1학년생 박초롱(19·여) 씨도 선거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박 씨는 고교생 시절 2004년 총선 당시 선거연령을 낮추자는 운동을 벌인 단체의 홈페이지 매일 들어가 글을 남겼다.
그는 "매일 신문의 정치 기사를 스크랩하며 후보를 선택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막상 선거일이 다가오자 누굴 찍을지 고민하게 된다"면서 "후보들이 매일 확성기로 자신의 이미지만 선전하는 탓에 누가 어떤 공약을 냈는지도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박 씨는 "그래도 투표는 꼭 해야 한다"면서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다.
그는 "월드컵, 기말고사 등으로 친구들이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우리의 대표를 뽑는 일은 우리의 미래를 가꾸는 일이므로 반드시 투표를 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새터민 김모(22) 씨도 생애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다. 그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2003년 가족을 두고 홀로 두만강을 넘어 지난해 4월 한국에 들어왔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힘겹게 살면서도 대학에서 공부해 작가가 되고 싶다는 김 씨는 TV와 책을 보며 날마다 자신의 억양을 고치고 있다. 그는 아직까진 북한과는 너무나 다른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버겁다.
주민의 대표자를 자유롭게 투표해 선출하는 일도 북한에선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박 씨는 투표라는 게 어색하게 느껴져 투표를 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남한 사회에 적응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는 요즘 후보들의 공약과 인적 사항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다.
김 씨는 "사실 누굴 뽑아야 할지 아직도 고민"이라며 "드디어 선거에 참가할 수 있게 돼 진짜 한국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weappon@donga.com
김상운 기자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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