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 상황은 옹색하기만 하다. 제주도에서 남북이 발표한 합의문에는 열차운행이라는 단어의 그림자도 들어 있지 않다. 통일부는 ‘조건이 조성되는 데 따라’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주절주절 설명을 하고 있지만 그런 흐리멍덩한 단어들을 신뢰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합의문이라는 걸 내놓은 남북 대표들부터 오락가락이다. 제주도 합의문에는 남측 대표인 박병원 재정경제부 차관과 북측 대표인 주동찬 민족경제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서명했다. 한 달 전 ‘경의선 및 동해선의 열차 시험운행을 5월 25일 진행하기로 했다’는 합의서에 서명한 주인공도 그들이다. 남북 대표, 한 입으로 두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다. 날짜까지 못 박은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어긴 북한이 이번에는 ‘애매한 표현’을 무겁게 여길 것이라고 친절하게 해석해 주는 우리 정부 관리들의 너그러운 마음씨도 놀랍다.
이번 불행은 북한 군부와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비켜가려는 정부의 전략에서 비롯됐다. 북한 군부로부터 군사 보장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탑승자 명단 통보라는 편법으로 열차 시험운행 행사를 추진하다 망신을 당한 것이다.
북한 군부가 어떤 세력인가. 올해 들어 현재까지 확인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개 활동 54건 가운데 37건(68%)이 군부대 시찰이다. 김 위원장은 대략 5∼6일에 한 번꼴로 군부대를 찾고 있다. 그가 군부대를 찾아가 무슨 일을 하겠는가. 혹시 “남한에서 고맙게도 우리에게 쌀과 비료를 보내 주고 있으니 평화롭게 살자”는 연설을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는 끊임없이 전투력 강화를 강조하고 “조국 수호를 위해 청춘도 생명도 기꺼이 바쳐야 한다”며 병사들을 세뇌하고 있다.
이른바 군이 모든 것에 앞선다는 ‘선군(先軍)정치’의 실상이다. 군과 김 위원장은 일심동체인 것이다. 선군정치의 뿌리도 깊다. 1995년 1월 1일 김 위원장이 다박솔 초소라는 곳을 지키는 한 중대를 시찰한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북한 군부의 실세는 김 위원장의 수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에 취임한 이후 지금까지 16차례의 장령(장성)급 인사를 통해 측근을 승진시키고 요직에 기용해 친정체제를 구축했다.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를 비롯해 군 실세들이 모두 그의 측근인사들이다. 군부대 시찰 때 단골로 따라다니는 이명수 현철해 박재경 대장의 충성심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북한 군부가 남북 교류에 제동을 건 것이다. 그건 김 위원장이 반대했다는 뜻이다. 북한 지도부를 남북 교류에 적극적인 내각과 소극적인 군부로 구분하는 이분법도 위험한 발상이다. ‘1인 지배체제’인 북한에 무슨 다양한 목소리가 있단 말인가.
북한의 전부인 군부에 휘둘리는 건 결과적으로 그들을 돕는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선군정치를 지원하는 셈이 된다. ‘남한 정부도 선군을 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거든 북한 군부와 당당하게 맞설 각오부터 해야 한다.
북한 군부가 변하지 않으면 남북 사이에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한반도 평화를 요란하게 떠드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선군을 ‘중군(中軍)’ 또는 ‘후군(後軍)’으로 변하게 할 꿈을 갖고 있습니까.
방형남 편집국 부국장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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