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의장은 “17대 국회 출범 이후 권위주의가 해체되고 민주적인 토론 공간은 넓어졌지만 대립과 파행은 반복되고 있고 생산적 통합 기능은 크게 미흡하다”며 이같이 말했다.
또 임 의장은 “21세기에 맞는 헌법 내용을 연구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며 개헌 논의에 적극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임 의장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유신 말기이던 1979년 결혼식을 위장해 유신 반대 비밀집회를 연 ‘YW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상임위원장으로 재야 활동을 계속했다.
1988년 재야 영입 케이스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하던 평민당에 입당해 13대 총선에서 서울 노원을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민주자유당 김용채 후보와 재대결한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뒀다. 최초 개표에서는 36표 차로 ‘낙선’해 김 후보가 의원 배지를 달았으나 4개월 뒤 실시된 재검표에서는 임 의장이 172표 차로 이기는 결과가 나와 국회의원이 뒤바뀌었다.
1997년 대선 때는 국민회의 정세분석위원장으로, 2002년 대선 때는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정책본부장으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일조했다.
국민회의와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지낸 정책통으로 열린우리당에서는 당 싱크탱크인 열린정책연구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4대 주요 법안 처리 무산으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일괄 사퇴했던 2005년 초에는 4개월간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아 무리 없이 당을 이끌었다고 해서 ‘구원 투수’란 별명을 얻었다.
직선적인 성격으로 처음엔 대하기가 쉽지 않지만 뒤끝이 없다는 게 장점이다. 당내에선 ‘바둑 친구’인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친분이 두텁다.
△전남 나주(65세) △고려대 법대 △동아일보 기자 △제16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열린우리당 의장 △14∼17대 4선 국회의원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신임 국회부의장 프로필▼
○ 열린우리 이용희 부의장
1971년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을 도우면서 ‘형님, 아우’ 하는 막역한 사이였으나 1997년 대선 때는 “정계 은퇴 약속을 지켜 출마하지 마시라”고 만류해 이후 서먹한 관계가 됐다.
6·25전쟁 때 자원입대해 전방부대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이때 갖게 된 파편 4개가 아직도 ‘전투의 상흔’으로 몸속에 남아 있는 국가유공자(상이6급)다. 현역 최고령 국회의원이지만 요즘도 매일 아침 팔굽혀펴기를 220회씩 한다.
△충북 옥천(75세) △대전사범학교 △신민당 사무총장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국회 행정자치위원장
조인직 기자 cij1999@donga.com
○ 한나라 이상득 부의장
대학 졸업 후 섬유회사 직원으로 취직해 코오롱상사 사장 자리까지 오른 전문경영인 출신이다. 1988년 13대 국회에 민정당 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에서 사무총장, 원내총무, 정책위의장, 최고위원 등을 두루 거쳤다.
노장이지만 당내 소장파 모임인 ‘미래연대’의 고문으로 있는 등 젊은 의원들과도 가깝다. 요즘도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퇴근할 때에는 수도꼭지와 전기스위치를 직접 살펴보는 등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경북 포항(71세) △서울대 경제학과 △한국능률협회 부회장 △13∼17대 국회의원 △국회 재정경제·운영위원장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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